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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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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正祖, 1752년 10월28일 (음력 9월 22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성과 휘는 이산(李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정조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

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

였다.

노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노론, 특히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

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음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를 뿌렸다.

 

박지원 등의 진보적 문장에 반대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고, 서인의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

기도 했다.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생애 (두 번째 원손으로 태어나다.)

 


                                                                                           정조어서, 정조가 세손시절인,

                                                                                                 8세때 직접 쓴 한글 편지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

으로 호를 정하였다.

 

의소세손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때여바로 세손으로 책봉하지는 않다가 의소세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

에서 경전을 외워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 번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

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15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그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책하였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짐짓 떠보기도 하여 사도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태어난 해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는 병중에도 사도세자가 올리는 탕약을 받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심리학자 강현식사도세자가 우울증이기 보다는 오히려 조증과 함께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심리

태를 보였다고 판단하면서 이는 숙종, 영조, 정조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고 있다.

 

사도세자는 노론이었던 홍봉한 가문을 처족으로 맞이하였지만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하여 영조와 불화를 자초하였다.

 

영조 스스로가 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때문에 영조의 탕

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 밖에 없었다.

 

1762년 윤5월에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세자의 죽음이 병때문

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등고사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세손 시절


1761년(영조 37년), 세손은 관례를 하고 자를 받았다.

 

관례식에서는 대재학 김양택이 지은 반교문이 낭독되었는데, 나라의 맏손자로서 대통을 이을 사람임을 명

하고 요, 순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당부가 있었다.

 

1762년 2월 훗날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을 맞아 가례을 올렸으니 뒷날의 효의왕후이다.

 

 

                                                                                                             영조

 

 

1762년(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세손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루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 세손은 9세였다.

 

이후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1764년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위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이었으나 9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효장세자의 빈이었던 효순왕후역시 정조

가 태어나기 전인 1751년(영조 27년) 36세를 일기로 별세한 뒤였기때문에 정조의 양자 입적은 왕위계승권

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세손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의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학습을 하였는데, 왕이 하는 것은 경연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이

라고 하였다.

 

세손 역시 세자와 같이 서연을 열었고, 서연을 전담하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원래는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기관인 세자익위사의 문관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서연에서 강론된 책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과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하여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하고 열살 이후로는 《사략》, 《강목》

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강론하였고 열일곱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와 같은 것을 또 다시

별도로 강론하여 하루에 세 번의 서연을 여는 강행군이었다.

 

서연은 존현각에서 행해졌고, 주변에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와 같은 누각들에 책을 비치하여 도서관으

삼았다. 1774년 정조는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 공부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경학 못지 않게 무예의 단련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즉위 이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대리청정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

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 두 자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

   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125권, 51년 11월20일 (계사)

 

 

당시 세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

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조 또한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을 세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

하였다.


즉위 직후

 

1776년(영조 52년) 음력 3월 5일 묘시에 영조가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영조가 승하한 지 5일이

지나 왕세손 이산은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사도세자 추숭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권 3월 10일 (신사)


 

정조는 즉위식을 연 바로 그날 자신이 사도 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정조의 이런한 천명은 죄인지

자불위군왕(罪人之子不爲君王,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던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정조는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숭하

였다.

 

그러나, 생부를 장헌으로 추숭하는 것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생부의 추도사업을 할 뜻없음을 함께 내비쳤다.

 

이는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보내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으로 이 문제

일단락 지었다.

 

신하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홍봉한의 사형도 요구하였으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단식을 하며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사도세자의 추숭과 복권은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으나 진행이 쉽지는 않았다.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시

작하며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배알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년 처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 역시 이 일을 언급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정조 즉위 직후 소론 측이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자 정조는 홍국영을 앞장세워 이들

사형에 처했다.

 

이 일로 정조는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들의 의구심을 풀 수 있었지만, 사실상 정적인 노론

벽파를 견재할 수단을 잃은 셈이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다시 추숭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 뒤로 13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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