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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장조인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는 당쟁 때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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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장조인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는 당쟁 때문이었나?

 

장조(莊祖,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은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는 후일 저서 《한중록》에서 그가 의대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였다가 후에 고종 때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莊宗)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대감'이었다.


출생과 세자 책봉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생후 1년만에 원자 정호를 받았다. 그가 태어날 때 부왕 영조는 친히 모친 영빈 이씨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그는 후궁 출신 서자였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고, 모친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부왕 영조를 적대시하던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저승전 이었고, 저승전 옆에는 지난 희빈장씨가 거주하던 취선당이 있었다. 세자는 그들로부터 독살설과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접하게 된다. 이때 저승전의 나인들 중 한상궁과 이상궁이 주로 세자를 대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역할을 분담하여 세자를 훈육하였다. 부인은 후에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그는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10세 때 노론 출신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홍인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 어린 세자가 노는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이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하고 영조를 두려움과 무서워했으며 영조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웬만큼해도 눈에 차지 아니하고 못마땅히 여겼는데 이 또한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 때문으로 보인다. 영조 주변에서도 그의 후계자로서 곧 세자로서 자질에 의문을 표하고 적대적인 이들이 많았다. 궁에서는 왕의 젊은 총희(寵姬) 숙의 문씨(文淑儀)와 문성국 남매, 그리고 왕의 계비 정순왕후 등과 사이가 좋지 못해 이들의 참소가 심했다. 조정에서는 김상로, 홍계희노론 중진과 노론 출신 왕족인 김한구, 김귀주 등도 그를 공격했다.

노론측은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이덕일은 그가 광증을 앓았는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소론을 지지하던 그는 경종의 독살설을 나인들에게 전해듣고 부왕 영조에게 황숙은 어떤 죄로 죽었느냐며 항변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정신병 논란 속에서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도 부왕 영조 앞에서 죄없는 죽음을 운운할 만치 우을증이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을 출산한다. 그가 후일의 정조가 된다.

 

대리 청정 기간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세손이 태어난 해 영조가 병석에 눕자 세자는 약을 진어(進御)하게 되었다. 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받았으며 이때는 도성에 있는 부왕 영조를 그리워하는 편지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도 억압기제를 제거하면 상태가 호전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병을 앓지 않았다고 단정지을만한 근거는 아니다. 또한 소론 출신 재상 조현명, 이종성 등은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 노론 중에서도 원칙론자인 유척기, 이천보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영조, 노론과의 갈등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한 편지 사도세자는“내 나이가 금년 15살 봄을 넘긴 지가 오래 됐으나 아직 한 번도 명릉(숙종의 능)에 나아가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어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가문을 선택하였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1749년에 보낸 편지)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2년 보낸 편지)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1754년 10월 또는 11월에 홍봉한에게 보냈을 편지에서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나라살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 (1755년 11월 그믐날)

 

 

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들 중에는 우울증을 호소하는 대목도 나온다. 1756년 2월29일 21세의 사도세자는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 고백이다. 편지에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사도세자는 만 14세인 1749년 장인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다. 여기에 대해서는'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노론의 대신들 역시 그의 실수와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정성왕후 생존에는 유화적이었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후에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세자궁에 있던 관료 조유진은 형수이기도 한 효순 현빈의 친정 조카였는데 사도세자는 그를 통해 자신의 형수의 동기간인 조재호와 연결,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소론계열이었던 조재호는 정순왕후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으로 은퇴하였다가 후에 사도세자의 구원요청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사사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은 그를 수시로 탄핵, 비판하였고, 시댁이 소론 계열이었던 화완옹주 역시 그를 공격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하지만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모함했다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아서 추측에 불과하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 당원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경언 사건과 의문의 관서행

노론을 지지하는 아버지 영조와 정견을 달리 하여 대립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의 결정적인 이유라는 주장이 있다.  1762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어 세자의 위를 폐하려 하였다. 이어 윤(閏) 5월 또다시 세자를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나돌게 되었다. 뒤에 누군가의 사주로 밝혀져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나경언 사건으로 영조와 세자 사이는 크게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세자는 영조에게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렸다고 한다. 영조는 즉위초 탕평책(蕩平策)을 펼쳤으나, 즉위 과정에서 노론의 도움으로 즉위한 것과 경종 독살설,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노론 4대신이 세제시절의 영조를 지지하던 과정에서 사형당하는 등 친노론적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고, 그는 주로 소론의 편을 든 것도 부자관계를 악화시킨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해 세자는 갑자기 평안도를 다녀오게 된다. 그러나 그가 동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김상로 등이 영조에게 고해바치자 그는 평안도에 간지 하루 만에 말을 타고 한성부 세자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영조는 그가 평안도에 다녀온 것을 눈치챘고, 세자궁

근처에 땅을 파놓고 창과 방패, 말 등을 숨겨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노론에서는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거듭 탄핵하였고,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그를 포기하고 영조의 편을 들게 된다. 영조는 또 어느날 밤 꿈에 그를 양자로 입양한 자신의 원비 정성왕후가 나타나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계시하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법적 모친의 계시와 생모의 비판 등으로 그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사형

1762년 7월 4일(윤5월 13일) 결국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세자를 가두었다. 그 뒤 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죽)과 물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는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만다. 8일 뒤인 7월 12일(윤5월 21일) 아사한 사도 세자의 사망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정조는 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를 상시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한편 세자가 비밀리에 도움을 청했던 조재호 등은 위리안치 후 사사되었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현위치(경기도 화성시)로 옮겨진다.무속신앙에서는 그가 뒤주에서 굶어죽어 뒤주를 가득채운 쌀알이 되었다고도 한다.


금기와 복권

사도세자가 살인을 수시로 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성한 기록이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 영조의 말 등을 볼 때 일부 사실로 추정된다.

 

(사도세자는) 정축년·무인년(영조33~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38년 윤5월13일자 기사 중

 

그를 도우려고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던 조재호춘천에 유배되고, 조재호와 세자를 연결하였던 세자방 관원 조유진고문을 받다가 사망한다. 조재호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아사할 무렵 위리안치 처리되었다가 그의 발언을 밀고한 밀고자가 나타나면서 사약을 받는다. 세자의 측근들 중에는 사형을 당했고, 세자의 뒤주 감금을 반대한 한림윤숙 등은 원지에 유배당한다.

죽은 지 보름만에 복권되었다. 이때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종사를 위해 결단을 내린 후 은정을 베푼 것이라고 영조가 말한 바 있다. 영조는 이후 당시의 사실과 소감을 적은 금등 문서를 남기기도 한다.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동년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영조 재위기간 내내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세손노론의 반격을 우려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정조는 1776년(정조 원년) 즉위하자 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발언을 하여 사실상 원적을 회복한다. 전라남도 무안군 남동리에는 백성들에 의해 그의 사당 동암묘(東巖廟)가 세워졌다. 마을 사람들의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나자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 한다.

 

사후

즉위 후 정조는 그를 복권,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垂恩)[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垂恩)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국왕의 생부로서 존대했다. 정조는 경모궁안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항상 부친의 사당을바라보게 하였다 한다. 그 후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생전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의 반대와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결국 고종 때 가서야 그는 왕으로 추존된다.

1899년(광무 3년) 고종 황제는 임금으로 추대하여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가, 1901년10월 17일 광무 5년 다시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고 하였다.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정조는 사후 생부의 곁에 묻히게 되어 융건릉이 조성된다. 부인 홍씨가 남긴 저서 한중록의하면 그는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기록하여 우울증과 정신적 질환을 앓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0년대 이후 이의가 제기되고 있으며, 당쟁에 의한 희생자라는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논란과 의혹

 

의대병 논란

부인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그가 옷 입기를 꺼리거나 특정 옷감을 꺼리는 의대증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의대증에 걸렸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신질환 여부 논란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그가 정신이상 증세와 조울증 증세와 비슷한 증세(광증)를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18~19살이던 1753~1754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나는 본디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가, 지금 또 더위 먹은 가운데 대궐에서 임금(영조)을 뵙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썼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광기를 앓았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한중록에서 묘사한 것처럼 아버지 영조화협옹주, 화평옹주는 총애하고 세자를 구박했다는 기사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 온양행궁에서 그가 백성들을 진휼하고 위문한 점 등을 들어 후대의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정신이상자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기라고 지칭하지 않았을뿐 사도세자에게 병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정조 본인도 아버지의 병을 스스로 인정하였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을 병으로 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쿠데타 기도 의혹

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1762년(영조 38년) 의문의 평안도왕환길 무렵 동궁 근처 전각의 지하에 광중을 파고 군기붙이를 숨겼던 것이 영조에게 발각된 일을 두고 그가 미구에 쿠데타를 일으켜 영조를 은퇴시키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쟁설과 관련환 의혹

사도세자가 노론의 반발로 인해 당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당쟁설은 현재 임오화변의 유력한 정설이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임오화변의 당쟁설에 반하는 기록들이 있었다.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 경종, 영조편>에서 당쟁설에 관한 몇 가지의 한계점을 제시하였다.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했다는 기록의 한계점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여, 노론의 반발을 샀고, 이는 임오화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록에 기록되있던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어느 당에 기울이지 않은 매우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날부터 세자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서는 자신이 처리했다.

본래 대리청정은 왕의 건강이 위독할 때 세자가 대신 정무를 맡는 형식이었는데, 대리청정을 맡길 당시 영조는 비교적 건강한 때였으니 본래의 목적을 위한 대리청정이 아니었다. 대리를 맡길 당시 영조는 세 가지의 이유를 내걸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궁에게 정사를 밝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세자에게 현실의 정치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대리 초기에 왕은 상서에 대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자에게 현실정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또한 정통성에 관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가 대리청정을 한 이유는 형식적이었지만 대리를 통해 자신이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대리는 형식적으로 하였던 것이지 중요한 정무까지 세자에게 맡기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므로 세자의 대리영역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자는 부왕의 결정에 반대하지 못하여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알겠소.', '그럴 수 없소.', ‘대조께 아뢰어 결정하겠소.’라고 하는 등 소론에게 편중된 모습은커녕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한번은 조현명이 세자의 대리에 대한 소극적인 모습을 지적하였었다. 그러다 왕의 의중을 알게 된 조헌명은 한 달 보름 남짓 후에 세자에게 ‘매사에 부왕의 뜻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며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했다.당쟁론에서 세자가 소론을 적극 옹호했다는 주장은 여러 역모사건 이후 잔여 소론 세력들의 처벌을 거절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이는 영조가소론이 노론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이에 대해 “대조께서 반대하시므로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노론의 처벌 요청에 대해 거절하였던 것이다.

소론 처벌에 대해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했지만, 독단적인 결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또한, 세자의 보고를 받은 영조는 이들의 상서에 대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라고 하면서, 세자가 관대하게 대한 것에 대해 가볍게 지적하고서는 상서를 올린 이들을 귀양 보냈다.

이 후에 영조는 이들을 풀어줄 것을 상소한 자들까지도 당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귀양 보냈다. 이 후에도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들의 처벌에 대해 거절하였던 일 대부분은 ‘대조의 뜻이므로 따를 수 없다.’라고 답하였었다.

이외에 다른 대신들의 처벌과 관련한 논의나 상서에 대해서도 세자는 대조의 뜻이라 하며 거절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세자가 부왕의 뜻을 따랐고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자제했다고 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세자는 탕평을 지향하였는데, 격한 상서를 올린 이에게 당습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영조가 지향한 탕평의 뜻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대리청정에서 대부분의 사안들은 영조의 결정에 따랐고, 영조가 소론세력의 처벌을 저지하여 세자가 이를 지지했다는 기록들은 영조가 친노론이었고, 사도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당쟁설의 주장에 한계점을 가져다 주는 셈이다.

 

노론의 사도세자 모함에 대한 기록의 한계점

소론을 옹호했다던 사도세자에 대해 노론이 그토록 경계심을 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당시 소론과 노론의 세력 차이를 본다면, 소론은 영조를 노렸던 반란과 수많은 역모사건으로 인해 자신들을 스스로 무너뜨려 세력 회복을 도모할 수도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고, 노론은 사라진 소론의 빈자리를 채워 조정을 대부분 장악하였다. 또한, 당시 노론의 최고 실력자는 지방에서 후생을 양성하는 당의 영수가 아닌 영조의 외척으로 조정의 최고 실세였던 홍봉한이었다. 그만큼 노론의 입지는 매우 탄탄하였고, 이미 와해된 소론에 대해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도세자를 모함했다고 알려진 인물들로는 김상로나 후궁 문씨가 있고, 정순왕후가 그 중심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궁에 들어올 당시에는 영조 35년으로 이미 세자와 왕의 갈등은 불거진 상황이었다. 또한, 정순왕후의 세력은 임오화변 이후에도 홍봉한의 세력과 대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순왕후 중심론은 신빙성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김상로나 후궁 문씨 등이 세자를 모함했다는 기록이 <실록>이나 <한중록>에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영조 사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발언에서 나온 기록들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 영조가 재위하던 당시에 써졌던 세자에 대한 상서들은 서연(조선 시대 때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을 열지 않는 점이나 관서행, 재신을 접견하는 예, 진현(세자가 왕에게 나아가 안부를 묻고, 수라를 살피는 예)과 관련한 부분이 대부분인데, 이는 유교 교육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했던 조선에서는 지극히 있을 법했던 비판들이었다.

오히려 신하들이 세자의 잘못을 숨기거나 영조가 세자를 질책할 때마다 세자를 옹호하고, 둘 사이에서 화해를 중재하려 했다는 기록이 더 많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근거로는 사도세자를 죽게 한 원인 중 하나인 관서행이 영조에게 알려지는 과정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사도세자는 1761년 4월 2일부터 4월 22일 사이에 관서지방을 유람하였었다. 이후에 사도세자는 유생과 대신들이 자신에게 관서행에 대한 상서를 올리는 것을 받고서는 영조가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영조에게 1년 만에 진현을 찾아왔었다.

1년만에 행한 진현은 자신의 관서행이 들켰는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그 뒤로 관서행이나 진현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관서행을 들킬 수 있다는 불안감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영조가 세자의 관서행을 알게 된 시점은 5개월이 지난 9월이었다. 5개월이란 시간동안 대신들은 물론 유생들까지도 알고 있었던 세자의 관서행을 영조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혹 알고도 모른 척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자가 관서행을 영조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했고, 관서행을 알게 된 그날 영조는 5월의 <일기>를 살펴 관서행에 대한 기록을 찾게 했다는 점을 봤을 때 그동안 몰랐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만약, 노론세력들이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는 세자를 탄핵하고, 모함하려고 했더라면 관서행이나 세자의 비행을 즉시 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론의 신하들은 5개월 동안 영조가 직접 알게 되기 전까지는 세자의 관서행에 대해 알리지도 않았다. 또한 이후로도 세자의 잘못(시전에서 돈을 빌려 쓴 행위,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서도 묵과하였다. 세자의 비행이 모두 밝혀지는

나경언의 고변 때 영조는 당시 입시해있던 모든 신하들에게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元良)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는 그동안 영조가 세자의 잘못과 비행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들을 봤을 때,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해 노론의 반발을 사서 노론의 탄핵이나 모함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게 되어버린다.

 

영조가 친노론이었다는 점의 한계점

또한, 당쟁설에 대한 한계점으로는 영조가 당쟁으로 인해 아들을 없앴을 만큼 친 노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노론세력이 아무리 세자를 모함했다고 해도 영조는 노론의 모함에 휘말려 자신의 아들을 죽일 만큼 판단력이 부족했던 임금은 아니었다.

영조는 매우 냉정하고, 치밀했던 성격으로 자신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신하들을 압박하고는 하였다. 영조는 숙종 이후 떨어진 왕권을 강화시켜 대부분의 기득권층이 손대지 않던 민생의 안정에 힘써 조선 후기의 부흥을 불러왔다.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날카로웠고, 정국을 주도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던 임금이었다.또한, 영조는 탕평정치를 지향했던 임금이었다. 물론 후기에는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는 단지 영조가 친 노론이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종을 죽인 것은 노론과 영조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소론(그중 준론이 가장 심하

였다.) 세력들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고, 각종 역모계획을 꾸몄다가 전부 실패하면서 대부분의 소론 준론들은 와해하게 된다. 이후의 소론은 최소한의 완론 세력들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 정치는 노론 위주의 정치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모사건 이후에도 영조는 소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이나 노론 중심의 정치를 저지하였다. 자신과 노론을 신원하는 책인 <천의소감>을 편찬할 때 영조는 서론에서 소론이 지나치게 폄하되는 기록에 대해 “이 책이 당론에 대해 지어졌는가?”라고 하며, 분개하여 노론의 신하들로부터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소를 받아내고, 붕당정치에 대해 강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었다. 다만, 노론 위주의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끌어들인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 외척 중 대표적인 인물이 홍봉한으로 홍봉한은 노론이기도 했지만, 영조에 의해 실세로 떠오른 인물이었고, 때문에 홍봉한은 영조의 뜻을 앞세웠다. 영조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바탕으로 왕권 중심의 정치를 확립한다. 강력한 영조의 왕권은 죽기 몇 년 전까지 계속되었고, 영조는 탕평정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에는 한유라는 자가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에서 ‘일물(뒤주를 일컫는 표현)을 바친 죄’를 다스리라는 부분에서 영조는 ‘비록 홍봉한이 바쳤다고 해도 그 물건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더냐?’라고 하였다.

 

결론

사도세자가 친소론으로 친노론이었던 영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노론이 세자를 탄핵하거나 모함하여 영조를 분노케 하였으며, 때문에 세자는 당쟁에 휘말리게 되어 죽게 되었다는 당쟁설에 대해 사도세자와 관련한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봤을 때 당쟁설과는 반대되는 기록들이 더 많았다. 영조의 뜻에 따를 뿐이었던 대리청정 과정에서 사도세자는 소론을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노론이 대부분이었던 조정의 신하들은 세자를 모함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관서행이나 각종 잘못, 비행들을 영조가 직접 알게 되기 전까지 상소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로 유력하다는 당쟁설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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