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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보기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담 하나를 경계로 대한제국을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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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는 천장산(天藏山)은 하늘이 감추었다는 이름이며, 한양의 주산 북악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려온 곳으로 조선황실의 땅이었다. 천장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1897 - 1919)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고종황제)의 황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와 의민황태자의 맏아들이자 엄귀비의 손자인 이진(1921~1922)이 모셔져 있다. 번잡한 청량리동에서 담 하나를 경계로 숲이 우거진 아담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을 보는 듯 그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영휘원 

엄귀비는 조선 철종 5년(1854) 11월에 평민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태어나 5살에 아기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명성황후 민씨의 총애를 받아 그를 모시는 시위상궁이 되었다. 그러나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샀고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10년 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입궐하도록 하였다. 왕비를 살해할 정도로 거칠어진 일본의 압박에 고종은 매우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 상궁이었던 엄귀비는 며칠 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일본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뒤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가마에 태워 러시아공관으로 탈출시킨다. 치밀하고 대담하게 진행된 이 ‘아관파천’을 통해 엄귀비의 성격과 지혜를 다소 짐작해 볼 수 있다.이 사건은 조선 국내는 물론 국외정세에도 큰 변화를 주게 된다. 1897년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황제가 된 고종은 김홍집 친일내각의 정책을 모두 폐기하고 우리나라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독립국임을 확인했다.

귀비는 광무 원년(1897) 44세의 나이에 의민황태자(영왕)를 낳아 상궁에서 귀인(후궁)으로 격상된 후 광무7년(1903)에는 황비에 책봉되었다.

귀비는 우리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력은 쇠약해져 의민황태자가 11살 나이로 일본에 볼모로 가게 되는데, 귀비와 고종은 늦게 본아들이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가게 되자 크게 상심하였다. 일제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황태자를 방학 때마다 조선으로 보내겠다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황태자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점심 주먹밥을 먹는 모습을 활동사진으로 보다가 그 충격으로 그만 이틀만에 승하하고 만다.

1911년 7월 20일 58세의 나이였다. 위패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칠궁(덕안궁)에 봉안되어 있다.

영휘원은 가끔 ‘홍릉’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근처에 있다가 옮겨간 명성황후의 홍릉(洪陵)과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홍릉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승하한 명성황후의 능으로 조영되었다가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옮겨져 고종황제와 홍릉(洪陵)으로 합장되었다.

 

숭인원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의 맏아들로 고종황제와 엄귀비의 손자다. 일제는 의민황태자(영왕)를 약혼녀와 파혼하게 한 후, 일본 황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여사)와 1920년 결혼시켰다. 황실의 후손을 낳지 못할 것이라는 일제의 예상과 달리 1921년 8월 18일 아들 진(晉)이 태어났다. 의민황태자는 생후 8개월의 황손 진을 데리고 일시 귀국하는데, 엄귀비의 장례 후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황태자 가족은 순종의 환대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나, 하루 전인 5월 11일, 어린 진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갑자기 죽는다. 배앓이로 죽었다는 공식발표와 함께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는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 순종은 황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서, 어린아이는 장례지내지 않는다는 당시의 관례와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황태자)의 예로 장사지내고 숭인원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그렇게 1922년 5월 17일 생후 9개월의 황손 이진은 할머니인 엄귀비 곁에 묻힌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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