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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삼한일통을 이루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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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삼한일통을 이루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다.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18일))은 신라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외척이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

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

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출생


《삼국사기》열전에 따르면 그는 금관국(金官國)을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 손이라고 한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

왕(仇衡王)은 법흥왕(法興王)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무력(武力)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聖王)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무력의

남이었던 아버지 서현(舒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냈다.

 

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野合)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

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

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어머니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辛丑日) 밤에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禮

記)》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庾)', '진(辰)'과 발음이 비슷한 '신(信)'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

유년기


그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유신의 인생에서

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花郞)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다.

그는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낭비성 전투

 

건복 46년(629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

였다.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고취된 신라군은 다시 용기를 얻어 진격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고 한다.

 

김춘추와의 만남

 

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波珍湌) 김용

(金龍春)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金春秋)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정월 오기일(烏忌日),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仁平)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주변)의

(軍主)로 옮겨간 그는 춘추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에 군사 1만(열전에는 3천)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것을 요청해 출동 기일에 대한 칙허를 받아냈으며, 신라에 간첩으로 와있던 승려 덕창(德昌)의 보고를 접한 고구려

조정은 방지를 위해 춘추를 석방해 무사히 풀려났다.

 

백제와의 전쟁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백제가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비담의 난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염종(廉宗) 등이 일으킨 반란(비담의 난)에서 명활성에 들어간 반란군과

맞서 유신은 춘추와 함께 월성에 설치된 진영에 주둔하며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할 징조다!”라 말하여 반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이에 김유신은 몰래 허수아비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보낸 뒤,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

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란군이 동요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비담을 쳐서 9족을 모두 죽였다. 그 사이 선덕여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勝蔓)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었다.

 

장년기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 에 들어온 백제군

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

(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

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

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데 성공했다.

 

승세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

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해에 당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춘추는 당의 황제로부터 원병 파병의 약속을 얻어내고, 아들 한 명을 당의 황제 옆에

겨두어 숙위하게 한 뒤 귀국하고 있다.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

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閼川)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의 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가을 9월에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智炤)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 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

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

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대장

소정방(蘇定方)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 훗날의 문무왕)과 장군 김진주(金眞珠) ·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병이 주둔하는 덕물도로 갔고, 이곳에서 당병은 뱃길, 신라군은 땅으로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해 백제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 벌판에서 만나 치열한

에 승리, 가까스로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당초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드

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전에 당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태도로 맞서 끝내 소정방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고종으로부터 현지에서의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소정방이 유신과 김인문(金仁問) · 김양도(金良圖)

세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식읍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상을 받을 수

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곡한 말로 거절하고 있다.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병력만을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데리고 당으

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하며

통일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고구려의 멸망

 

당은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공격의 후방 기지로 삼는 동시에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땅 전역에서 시작된 흥복운동으로 그 계획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귀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지휘하는 백제 흥복군은 당병이 주둔하던 사비성을 포위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신라군

은 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끊어진 사비성의 당병에게 금과 간장을

보내주기에 급급했다.

 

한편 사비성이 함락된 해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해 칠중성(七重城)에서 성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고, 이듬해인

무열왕 8년(661년) 5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해 20일 동안 전투를 치르고서야 퇴각하

있다.

 

9월에 신라와 당 사이의 주요 연락거점 한가운데에 위치해 백제군의 점거하에 있던 옹산성(瓮山城)이 함락되었고, 당

연합작전 계획에 따라 신라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

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면책권을

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 · 김진복(金眞服) ·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신의 나이는 68세였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고 건넜고 이에 모든 장병들이 따라서 강을 건넜다.

 

유신은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

이기면서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아 앞

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군이 도착했음

소정방은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元曉)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친 유신

김인문과 김양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퇴각했다.

 

유신의 명령으로 당의 진영에 갔던 양도 등은 따로 군사 8백 명과 함께 뱃길로 귀국했는데, 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

의 기습에 대비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는 등의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

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구려 병사를 뒤쫓아 수만 명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다시 추격해오자, 유신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해 패퇴

켰으며,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선발대로 뽑아 보냈던 열기와 구근에게 미리 급찬을 준 뒤, 문무왕에게

그들의 공로를 논하며 급찬보다 높은 사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백제 흥복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이 전권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

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재차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청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663년,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과 유신 등의 네 장수들이 이끄는 육군이 서로 육지와 바다

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에 당 고종이 보낸 사신 양동벽(梁冬碧) · 임지고(任智高) 등이 유신을 문안하여, 그에게 봉상정경(奉常正卿) · 평양

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라는 당의 관직을 주었다.

 

666년에는 맏아들인 대아찬(大阿飡) 삼광(三光)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당에 불려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

으로서 고종을 숙위하게 되었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문무왕이 원정을 나가고 유신은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

며, 대신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김인문과 유신의 아우인 흠순(欽純)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월 26일에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다. 한편 이 날, 왜(倭)에서는 덴지 천황(天智

天皇)의 근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신라의 사신인 사훼급찬(沙喙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에게 김유신에게

물할 배 한 척을 호벤(法弁)·신비쓰(秦筆) 두 사문을 시켜 전달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수어조선(輸御調船)

을 선물하였다.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예전 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정에 봉사하며 세운 공과 유신이 그간 이룬

들을 신료들 앞에서 술회하며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

동시에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유신의 요좌들에게도 모두 1등급씩 위계를 올려주고 있다.

 

당 고종 또한 김유신에게 조서(詔書)를 주었는데, 그 실물은 유신의 5세 손 때까지 보전되다 실전되었다고 한다.

이후 병으로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에는 참여하지는 못하고 다만 왕실과 군사의 원로로서 왕에게 여러 차례 전략 수립에

해 자문을 맡았다.

 

 

 

 

나당전쟁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옛 땅에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통치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미 당은 백제 흥복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664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고 문무왕을 호

출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이는 당의 괴뢰정권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와 맞서게 하려는 것

으로 신라에 의한 평양 이남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비열홀을 신라로부터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는 등,

당은 서서히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 다음으로 신라를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유신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병을 습격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다져 나갔다.

 

고구려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은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벌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그만 대패하였다.

 

신라의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이 전투에 유신의 아들로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원술(元述)이 살아오

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집안의 가풍을 더럽힌

죄'라 하여 법으로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원술을 사면했으나, 이후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여 이후 유신이 숨을

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편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하자는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등 각지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웅진도독부 소속 당의 병졸들을 9월에 돌려보내고 사죄문의 형식을 담

은 표문과 많은 물품을 당에 바쳤다.

 

사망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 라는 《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기일은 7월 1일. 향년 79세.

 

《삼국사기》열전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이 병을 얻기 한 달 전,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유신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를 지켜주

음병(陰兵)이 내 복이 다함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김유신 자신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興德王, 《삼국유사》는 경명왕) 10년(835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인물

 

유신의 인물상은 대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것이 전부다. 유년시절의 일화로 유명한 것은 《파한집》(破閑

集)에 수록된 것으로, 소년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

중을 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

내버린 채 돌아왔다.

사후 그녀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

 

가치관 같은 것을 보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별이 왕궁인 월성에 떨어진 것에 기세가 오른 반군을 상대로 놀라 어쩔줄

는 여왕과 신료들을 향해 "길함과 불길함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 이라며 일축하는 개명된 태도

를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백강까지 도착한 당군 장수 소정방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장군의 진영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원수(元首)가 해를 입을 징조'라 하여 겁먹고 상륙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소정방은 그제서야 의구심을 풀고

군사를 백강에 상륙시켜 전투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소정방이 백강에서 상륙하기 직전 김유신은 백강이 아니라 황산벌에 있었다는 시간적 모순이 생겨, 후대

람들이 김유신을 부각시키고 일부러 소정방의 용렬함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거나 비슷한 사건이 전투 초기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온 김유신이지만, 황산벌 전투로 약속 기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기일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를 주려 한다. 아무 죄도 없이 나는 이따위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당병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소정방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당병이 아직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그들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그들과 싸울 계책을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신

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말하여,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

한 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원술에 대해 "왕명

어기고 가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 라 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

받아 평생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실제로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훗날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 무열왕계 독재의 강화와 함께 그의 자손이

신라 정계로부터 냉대받으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삼국

사기》속의 일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다만 그의 전술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대체로 칭찬보다는 비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골품이나 신분, 관례보다는 능력과 공적을 중시해, 662년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병에게 군량을 수

송하는 데에 공을 세운 휘하의 열기 · 구근에게 사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며,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왕의 지적에

"벼슬은 공적을 담는 그릇으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 라는 말로 기어이 두 사람의 관등 수여

관철시키고 있다.

 

평가

 

이미 신라 당대부터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으로 숭앙받았다.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 알려진 문

무왕과 함께 김유신은 33천의 하나가 되어 신라를 진호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

이 현신(賢臣) 위징(魏徵)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것은 동격이

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설총과 더불어 그를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세

웠으며,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무왕과 그 신료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문무왕은 그의 조부 때부터 신라 조정에 봉사해 온 일을 들며, "지금 유

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으니, 공의 일가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며 김유신의 공적을 추

켜세우면서 관직과 은상을 올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신하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구근(仇近)

 

구근은 열기와 함께 김유신의 명으로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으로 김유신의 추천을 받아 사찬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파진찬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경(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는데, 원정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구

근이 일을 게을리 한다며 곤장을 치자, 구근은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

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께서는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으시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셨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소.”라며 억울해했고, 원정은 이 말에 평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윤관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은 평소 김유신을 존경했으며, 여진 정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이라 여름

이었는데도 강물이 얼어붙어 군사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니, 나라고 그렇게 못할

이 무엇이겠는가"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언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김부식

 

《삼국사기》열전 말미에서 김부식은 유신의 재능뿐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믿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공업을 이루었다며 신라 조정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는 한편으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잊혀질뻔 했는데 김유신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사대부는 물론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다며,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보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인용된 사론에서는 유신을 두고 "충분(忠憤)한 마음과 영위(英偉)한 지략을 기울여 통일의 공을

이루고 위(位)는 장상(將相)을 겸하여, 몸소 국가의 안위를 도맡아 20여 년 동안 우뚝이 국가의 장성(長城)"이 된,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적당한 때를 얻어 그 큰 공을 이룬 자"라 평가하며, "어려움을 두루 겪으면서 국사를 위하여 몸을

바쳐 공명과 충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전하였으니, 유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비길 만한 데가 드물다"고 호평하면서도,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것에 대해서는 고대 주(周)의 성왕(成王)이 숙부이자 재상이었던 주공(周公)의 제사를

천자의 그것과 준하게 한 일을 들어, 아무리 공이 크다고는 하지만 "신하로서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군신의 명

분을 문란하게 만든" 처사라 비판하고 있다.

 

부정적 평가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5천 군사의 계백과 맞서 싸웠으나 계백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

하였다.

 

군사의 수가 10배인 김유신의 신라군이 계백의 결사대와의 전투에서 오래 지체하면서 백제군 총합의 2배인 1만에 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유신이 계백에게 패배한 전투였다는 평가도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답보 상태에 빠진 대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화랑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볼모로 군사의 사기

를 높이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어린 화랑을 희생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었고 우세한 군세를 이용한 다양한 전술 구사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며 김유신

이 뛰어난 지략가라는 미사여구는 과장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백제 정벌은 당나라가 주도했고 고구려는 순전히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정권다툼으로 인한 내부의 분열로 자멸한 측면이 있

으며 당나라와의 전장에 김유신은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구려의 군력 자체는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둘 정도로 당나라보다 월등했

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의 아들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자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은 공정한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추종자들이 미화한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더군다나 김유신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 고구려의 멸망 자체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한 것인 데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마자 바로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건국해서 고구

려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는 발해가 차지했다는 점으로 보면 김유신

은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했다고 봐야 옳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김유신이 왕가의 외척이 되기 위해 그의 누이들을 이용했다는 점을 들어, 출세의 수단으로 가족을 이용

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묘소·사당


김유신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지사 북쪽 봉우리에 있고 부(府)와는 서쪽으로 4리 거리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쪽 서악리(西岳里)라 기록되었다.

 

김유신의 것이라 전하는 묘소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에 있는데 이것이 진짜 김유신의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자세한 것은 김유신묘 항목을 참조할 것).

 

이 묘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가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로 주석(柱石)을 세우고 거기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을 새기는 것은 신라에서는 왕의 무덤에만 허락된 것이었다. 김유신의 묘가 지금과 같은 왕릉으로서

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아마도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덤 면적은 14,143㎡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의 무덤 앞에는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해 새긴 비석이 세워졌는데,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였

던 설인선(薛因宣)이 그 비문을 지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비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임하필기》에는 그의 묘

비가 경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으며, 경주부사를 지냈던 홍양호가 그 묘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

다가 20년 뒤에 이서구(李書九)가 금석첩(金石帖) 속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탁본한 것 몇 장을 발견했는데, 필법이 구양순체

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존하는 무덤 앞의 비석은 후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하나에는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다른 하나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새겨져 있는데, 비석을 새길 당시 그가 흥덕왕으로부

터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묘(墓)」라 적었다가 나중에야 그 글자 위를 덮고 다시 「능(陵)」자로 고쳐

새겼다.

 

하지만 비석의 원래 재질과 글자를 메워넣은 재료의 재질이 서로 달라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능」이라는 글자 뒤에

려진 「묘」자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우고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년에 정비되었으며, 뒷산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탯줄을 이 산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경주에는 명종 18년(1561년)에 당시의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서

악정사(西岳靜舍)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과 1610년에 걸쳐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새로 지었고, 인조

원년(1623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고 지금의 서악서원(西岳書院)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에 더해 최치원과 설총을 더 배향하게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

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출생 전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국선이 되었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모의하던 중에 백석이란 낭도로부터 적국을 염탐하

고 오자는 제의를 받아 밤에 길을 가던 중, 고개 위에서 우연히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을 즈음 유신으로부터 밤길의 목적을 듣고 여자들은 잠시 백석을 여기 두고 숲에서 긴히 할 이

야기가 있다며 유신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들은 신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유신에게 백석은 적국의 사람으로 유신을 꾀어 적지로 데려가려 한다며

경고한 뒤 사라졌다.

 

골화관에 이르러 유신은 백석에게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온 뒤, 백석을 잡아 문초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되었

다.

 

 백석의 말은 이러했다.

 

백석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에서 국경의 강물이 역류하는 괴변이 생기자 고구려의 왕은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은 「왕비가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점괘를 내놓았고, 노한 왕비는 왕에게 터무니없는 말이

라며 다른 것으로 시험해보아 맞지 않으면 추남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왕은 쥐 한 마리를 상자에 숨겨놓고 추남에게 상자에 든 것을 맞히게 했는데, 추남은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다고 말하

면서 그 숫자는 한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라고 대답했다.

 

결국 처형당하게 된 추남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저주의 말

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왕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추남의 점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날 밤 고구려왕은 처형당한 추남이 신라 김서현의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추남이 신라에서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판단한 고구려왕과 그 신하들은 백석을 시켜 유신을 꾀어 죽

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백석을 처형한 뒤 자신을 구해준 세 신들에게 제사지내어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세 신은 실은 내림·혈례·골

화 세 지역의 신으로,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제사에서 시조묘나 종묘 다음으로 격이 높은 대사(大祀)로서 우대하였다.

 

 

 

 

김유신의 검(사인검/四寅劍)

 

김유신의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서라벌 중악(中嶽)에서 선인을 만나 신비로운 비법을 전수받고, 기도 수행하다 별의 정기

가 서린 보검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는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17세의 유신이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머문지

흘째 되는 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귀한 집의 자제가 어째서 여기에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유신이 노인의 이름을 묻자 노인은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 없이 인연을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한다」

고 소개했다.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 유신은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처음에는 묵묵히 말이 없던 난승은 유신이 여러 번

간청하자 그제야 신비한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유신에게 비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니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

고 난승과 유신은 작별하였다.

 

그가 2리쯤 갔을 때 유신이 쫓아가 바라보니, 난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산 위에는 오색의 찬란한 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건복 29년(612년) 유신은 다시 한 번 보검을 가지고 혼자서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중악에서 했던

것처럼 향을 피우며 하늘을 향해 보검에 빛을 드리우고 신령을 내려줄 것을 기도했다.

 

사흘째 되는 밤,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었다. 이후 김유신의 검은 별의 정기를 품은 영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의 단석산에는 마치 칼로 잘라낸 듯 표면이 반듯반듯한 바위가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현지의 전승은 그것이 유신이

이곳에서 검술 수련을 하며 바위를 잘랐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강릉에서 행해지는 강릉단오제는 김유신의 검이 명주(溟州) 남쪽의 선지사라는 절에서 90일 만에 주조되었다는 전

승을 전하고 있는데, 유신의 검은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 검을 가지고 유신은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고 죽은 뒤 명주 대관령의 산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단석산뿐 아니라 인근의 여러 산과 계곡, 동굴 등지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곳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백제의 공주와 작원성(鵲院城)

 

경주시 건천읍에는 작원성, 또는 작성(鵲城)이라는 토성이 남아 있는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성의 이름 유래에 대

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백제를 공격할 당시 김유신이 서라벌 왕궁에서 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백제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

하자, 둔갑술에 능하여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싸우는 자용병기(自勇兵器)라는 신비한 무기를 부릴 줄 알았던 공주가 왕을 안

심시키고자 자청해서 까치로 변신하여 이곳으로 날아왔다.

 

서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가 대장기 끝에 앉아 울자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해 진중(陳中)이 크게 어수선해졌는데, 김

유신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겨누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만 변신이 풀려 본래 모습으로 돌아

오고 말았다. 이후 이 성의 이름을 까치 작(鵲) 자를 써서 작성, 또는 작원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유신의 원령


《삼국유사》 미추왕죽엽군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14년(779년) 4월에 김유신의 무덤

위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김유신이 여러 병사를 거느리고 미추왕(味鄒王)의 능으로 들어가

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 안에서 탄식하고 통곡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살아서 평생 어지러운 것을 구제하였고 삼국을 통일

공이 있었으며, 죽어 혼백이 되었어도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에서 구제하려는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는데,

난 경술년(770년)에 내 자손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나라의 왕과 신하, 그 누구도 더 이상 나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더 이상 이 나라

위해 애쓰지 않으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김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무덤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즉 미추왕)가

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전처럼 힘써 주기 바라노라.」 라고 대답했고,

똑같은 요청을 세 번이나 더 했지만 세 번 모두 거절당하자 김유신의 혼령은 다시 돌아갔다.

 

이것은 김유신의 영혼이 후손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해한 나머지, 신라 왕실(김씨)의 시조인 미추왕에게 항의하며 호소한

것이었다.

 

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대신(大臣)인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사죄하게 하고, 김유신이 생전에

평양을 함락시킨 뒤 복을 빌기 위해 세웠던 절인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기타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밀교승 밀본과 관련해서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대동

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인용된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다섯 설화 가운데 「노옹화구(老翁化狗)」와 「죽통미녀

(竹桶美女)」는 김유신이 등장하는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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