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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 비폭력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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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 비폭력 만세운동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

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 또는 프랭크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신복룡 교수나 일본 측 야마기 겐타로 등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약 50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919년 3월 당시 일제 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

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신복룡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기록대로라면 전체

민 중 6.31%가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고,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

일로 지정되었다.

 

배경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

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

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인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절묘하게 기회를 포착하였다.

 

준비 과정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불교계의 대표로는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한편 윤치호는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강제병합 이후에도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선전, 선동을 하는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그밖에 이상재 등도 서명을 거부했고, 멀리 있었던 이승만 등의 서명을 받는데는 실패했다.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종

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

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

모일 장소는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뀐다.

 

 

01

02

03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

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군경

 3.1운동 진압 자제단 발족

 신문 기사

 

 

3.1 운동의 참여 인원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 중의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

하였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전국에서

의 장례를 위해 50만명의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삼일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

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1 운동의 비폭력 항쟁 중에서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이는 1919년 3월 당시 전체 인구 1,678만 8천400명 중 2.76%에 해당되는 인원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피해 규모

 

3·1 운동의 참여 인원은 최소 50만에서 20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3·1운동 이후 3개월간 만세운동 상황은 202만 3089명이 시위

에 참가하였으며, 시위 횟수는 1,542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이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

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악하였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총독부의 기록에 의하면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시위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검거자가 4만 6,9

48명 정도였다.

 

반응 및 파급 효과

 

만세 열기는 5월까지 계속되었다. 5월 31일 윤치호는 7,8명의 젊은이가 종각 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

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는 3.1 운동이 국내외에 한국인에 대한 시

각을 개선시켰다고 평했다.

 

한국인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했고, 조선의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국내 체류 미국

교사들의 시선을 개선시켰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의 잔인한 진압이 미국인 선교사들과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

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국내


3.1운동을 계기로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 국가 수립운동

이 첫 결실을 맺었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

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윤치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

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

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윤치호,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사건을 계기로 윤치호는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완용, 예종석 등의 3.1 운동 반대 발언이 알려지면서 이완용, 예종석 등에 대한 성토 여론이 조성되었다.

 

조선총독부 통치정책 변화

 

3·1 운동을 계기로 강경책 내지는 군사,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군인인 사이토 마코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한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식민 통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 명조차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

꾸었지만 사실상 명칭만 변경된 것으로 경찰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경찰

제'를 도입하였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량 양성

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

 

3·1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

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는 다른 점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

서 3·1 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 또는 “천변괴이의 상”이라고 표현하였다.

 

해외

 

대한민국의 일부 사학계에서는 이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의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3·1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고, 만세운동이라는 평화적 항쟁을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볼셰비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중의

폭력적 시위와 연결되는 점,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 3·1운동의 한계가 무산계급 투쟁의 불완전성에 의한다는 담

을 파급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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