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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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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다.

 

 

신립(申砬, 1546년 10월 23일 ~ 1592년 4월)은 조선 시대의 무신이자 장수로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와 진주판관, 임진

왜란 첫 해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고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신숭겸의 후손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입지(立之)라 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생애

 

신립은 명종 원년(1546년) 10월 23일 평산 신씨 화국과 부인 파평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조 신숭겸은 고려 왕건의 개국공신으로 그 뒤 조선 전기의 문신 신개는 조선 건국 이후 좌의정을 지내고 문희공의 시호를

받았다. 신개는 신립의 5대조였다.

 

고조 신자준은 음보로 기용되어 세종 27년(1445) 장령이 되고, 세조 원년(1455) 판종부시사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조 3년 첨지중추원사, 세조 6년 형조참의, 세조 7년 예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신말평은 장악원 주부로 예조판서 성현의 명을 받아 장악원

조 류자광, 전악 반곡과 김복근을 도와「악학궤범」편찬에 공헌하였다.

 

연산군 때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할아버지 신상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절이다.

 

신상은 타고난 성격이 화평하고 용서를 잘 하였으며 또한 관리의 재간이 있었다.

아버지 신화국은 성균 생원으로 전설, 별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아들이 공신이 됨으로 평주부원군 영의정 증직되었다.

 

무과 급제와 관료 생활


1567년(선조 1년) 22세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莩事), 도총(都摠), 도사(都事), 경력(經歷)을

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이 “자네는 큰 인물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하자 그는 이에 양응정을 스스로 모시고 그

게서 글을 배웠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은성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으나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

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 경원부에 침입하고 아산보(阿山堡)와 안원

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신립은 기병 500여기를 동원,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훈융진을 공격하던 여탕개의 1만명을 물리쳤고, 여진족이

도를 침략할 때 경유하는 안두리 부락을 불태웠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임진왜란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

(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宣祖)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杖)을 데리고 가고, 도중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충주에 도착하였다.

신립은 충주에서 방어진을 갖추고 왜적을 차단하고자 하였으나 도착한지 불과 사흘만에 전멸하고 말았다.

 

신립은 부하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진을 치고 기마전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왜군이 몰래 침입해 온 줄모르고 방심하다가 충주성을 빼앗겼으며, 마을에서 불길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말을 달려

반격에 나섰으나 참패하였다.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병력을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조령(鳥嶺)에 올라갔다가 상주에서 패하여 쫓겨 온 순

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용서

해 주었다.

 

이날 작전회의에서 종사관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 북방에서 기병을 통해 대승을 거뒀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무찌르

로 결정하고, 마침내 탄금대 근처에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4월 27일 왜적이 침입하여 척후를 나갔던 순변사 이일과 충주목사 이종장이 산속에 고립되었다.

이때 신립이 신임하던 부하 군관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군중을 현혹시킨다하여 참수하였다.

 

그리고는 왜적이 아직 상주에 머무르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다.

4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대규모 병력이 충주에 당도하였다.

 

적군은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일부는 산을 넘어 동쪽 깊숙히 침입해 들어가고, 일부는 달천을 따라 침입하였으며, 일부는

방비가 허술한 충주성에 침입하였다.

 

왜군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차고, 칼빛이 번쩍번쩍 하였다. 뒤늦게 왜군이 침입해온 사실을 알아차린 신립은 급히 말

을 채찍질하여 주성으로 달려나갔으나, 마을 간격이 협소하고 논이 많아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진영이 흐트러졌다.

 

이때 성중의 적이 호각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하여 아군을 포위하였다. 신립은 휘하의 여러 부대를 손수 지휘하여 두 번

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그들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최후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단신으로 싸우다 힘이 다하여 강가로 몰리게 되었다.

 

그는 항복을 하는 대신에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부장이였던 김여물(金汝物) 역시 따라 투신 자결하였다.

향년 47세.

 

평가

 

신립은 조선 중엽의 최고의 기병 권위자였으며 선조 임금은 이러한 신립을 크게 우대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상방검을 하

사하면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성룡(柳成龍)은 신립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신립은 다양한 평가를 받는 장수인데, 험한 산세를 활용하여 방어하지 않고 배수진을 친 무능력한 장수라는 평가와 5백 기병

으로 1만 군대를 격파한 기병의 달인, 단신으로 왜구의 부대에 뛰어들어 싸운 용맹한 장수, 왜구를 벨 힘이 다하자 스스로 몸

을 강에 던져 자결할 정도로 강한 성품 이라는 평가와 함께, 외고집이고 자신의 주장만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수적 열세에도 불구,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운 장수임에는 이견이 없다.

탄금대 전투에 관련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의 휘하에서 전투에 가담했던 순변사 이일은 구사일생으로 충주를 빠져나와 조정에 패전을 통보하였다.

역시 신립의 휘하에 있던 양재찰방 신흠 또한 신립의 패전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들의 증언과 기록에는 신립이 제장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무리하게 기마전술을 주도하였으며, 작전지역의 지형과 왜군의

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허망하게 패배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작전상의 잘못 보다는 최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고 기록하였다.

 

신경진은 전투 당시에 이미 적이 고개 밑에 당도하여 조령을 수비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으며, 탄금대에 나간 것은 아군의

련상태가 떨어지고 사기가 낮기 때문에 배수의 진을 침으로써 사지(死地)에 몰아 탈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예수회 소속으로 있던 루이스 프로이스또한 탄금대 전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서는 신

립군이 8만이며 대부분 기마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로이스 일본사) 또한 당시 조선의 제일 최고위의 장수가 맹렬히 싸우자 사로잡았으며, 끝내 저항하며 투항을 거부하자 처

형했다는 우화를 담고 있다.

 

적장의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탄금대에서의 전투경위를 간단하게 기록하였으며, 신립군 숫자를 '수만'이라고 적었다.

(서정일기) 전투가 끝난뒤 충주성을 점령하고 조선인의 머리를 베어 상부에 바쳤으며 신입석(신립)이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선조실록에는 신립군을 10만 정예병 대군 , 난중잡록에는 신립군을 6만 대군이라 적고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충주의 사민과 관속들이 신립을 믿고 피난하지않아 유독 심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

은 일본의 기록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강직하고 용맹한 장수임은 틀림없으나 하지만 그의 강직함은 나중에 독이 되었다. 신립은 일본군이 쓰던 조총을 너무 무시한

경향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재장전이 길고 명중률이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 신립은 기동력이 풍부한 기마대

와 바로 쏘고 빠른 장전이 가능한 활이 더 성능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북방의 육진에서 여진족을 없애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런 전공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의 신임 아래 든든한 구

원군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자 최고의 요새인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패배했다.

 

심지어 공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도 "천하의 요새를 버린 이 조선의 장수는 분명 바보일 것"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그가 패전한 설은 2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1.신립은 조총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이일이 수십만의 군대가 있다고하자 그는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어쩔수

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참패를 당했다.

 

2.신립은 조총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활과 기마대가 더 우수하다고 여겨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평지인 탄금대에

수진을 쳤지만 기마대가 당도하기 전에 조총에 몰살당했다.

 

이런 2가지의 설이 있으나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

만약 신립이 조령을 버리지않고 매복을 위주로 했다면 일본군에게 그리 처참하게 패배하지 않았을것이라는 이야기도 잇따

른다.

 

관련된 전설

 

신립이 젊은 시절에 요괴 또는 도적로부터 납치된 젊은 처녀를 구출해 내었다.

처녀는 신립이 거둬주기를 청했지만 신립이 이를 거절하고 이별했다. 그 직후 그 처녀는 자살했다.

 

이후 신립이 임진왜란이 터져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일본군을 막기 위해 천연의 요새인 조령에서 싸우려 했지만 어느 날 그 처

녀의 혼이 나타나 “탄금대에서 싸우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립은 이 말을 듣고 탄금대에서 싸우지만 패배해 전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묘역 곤지암

 

2012년 9월 20일 (목) 23:27 (KST) 현재 "경기문화재단 문화포털"에 따르면, 싸움에 겨우 살아남은 일부 병사들이 신립의 유해를

경기도 광주부(廣州府 현재의 광주시 (경기도))로 옮겨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를 닮은 괴이한 모양의 커다란 바위 하나

가 있었는데 누구든 말을 타고 이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말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내려서 걸어가야 했었고 그러면 땅에 붙었던 말굽도 떨어지고, 다시 말을 타면 또 붙고 했다. 그러던 중 한 장군이 근처를 지나

신립의 묘소를 찾아가 왜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느냐고 호통치며 핀잔했다.

 

그러자 갑자기 폭우 속에 천둥이 치면서 바위 윗부분에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에 바위가 쪼개져 괴이한 모습은 없어지고 그 옆

연못이 크게 생겼으며 이상한 현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큰-연못-바위, 한자로는 곤지암(昆池岩)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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