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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대각국사 문종의 넷째 아들, 교장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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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대각국사 문종의 넷째 아들, 교장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세우다.

 

 

의천(義天: 1055년 ~ 1101년 10월 5일)은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이다.

자는 의천, 이름은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시호이다.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악 출신이다.

 

출생과 출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仁睿王后)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

 

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 한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였다.

1065년(문종19) 왕사(王師) 난원(爛圓)이 의천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고, 그 뒤 영통사(靈通寺)에 있었으며,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

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승려 활동

 

1084년(선종1)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남루

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樂眞) · 혜선(慧宣) ·

도린(道隣)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

 

송나라 철종(哲宗)이 영접하여 계성사(啓聖寺)에 있게 하고, 화엄(華嚴) 법사 유성(有誠)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賢

首) · 천태 양교의 판교동이(判校同異) · 유묘(幽妙)의 뜻을 문답하였다.

 

상국사(相國寺)의 원조선사흥국사 서천(西天)의 삼장(三藏) 천길상(天吉詳)을 찾아보고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

(楊桀)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금산(金山)의 불인(不印) 선사 요원(了元)에게 들리고, 항주(伉州)의 원공(源公) 법사

를 찾아 혜인(慧因)에게 《화엄소초(華嚴疏鈔)》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

 

그때 선종이 귀국을 청하자 자변(慈辨)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智者)대사의 부도(浮圖)에 예배, 발원문

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영지(靈芝)의 대지(大智) 대사에게 계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를 문답하였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

(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요나라 · 송나라 ·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

였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興圓寺)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 ·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

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생애 후반

 

송나라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 서신으로 사상교류를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숙종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경제 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澄儼)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다.

1101년(숙종 6) 국사(國師)로서 활동하던 중 총지사(總持寺)에서 사망하였다.

1101년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

어도 유감없나이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다.

 

사후

 

오관산(五冠山) 영통사 동쪽에 장례하였으며, 김부식(金副軾)의 명문(銘文)으로 된 비가 세워지고, 또 남숭산(南嵩山) 선봉사

(仙鳳寺)에도 임존(林存)의 명문으로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가 세워졌다.

 

서호(西湖)의 승려 혜소(惠素)는 국사의 고제로서 후에 행록(行錄) 10권을 선집하였으며, 태백산인(太白山人) 융응(戎膺)은 국

사의 적사(嫡嗣)로 법해(法海)의 용문(龍門)이라 호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사후 그의 제자들

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

(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실전,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

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 등이 현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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