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청일전쟁,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다.

반응형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 육군

 

 

청일전쟁,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다.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중국어 간체: 中日甲午战争, 정체: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퇴보와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배경

 

일본은 1603년 에도시대를 열고 쇼군(將軍)의 통치가 200년간 계속 되었으나 미국의 간섭으로 1854년 쇄국정책이 끝나 시장을

개방하게 되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과 막부시대의 몰락에 이은 수 년간, 일본인들은 일본이 봉건의 상대적인 후진 사회에서 근대 산업 국가

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일본은 각국에 대표단과 학생들을 파견하여 서양의 예술과 과학을 배우고 모방하려 하였다.

 

또 일본은 사할린 섬, 쿠릴 열도, 둥베이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을 경계하여,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침략

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쇄국 상태로, 주변의 사회 정세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아서, 일본에서 일어난 개혁의 의도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치의 실권을 취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제외한 모든 서양·일본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였고, 결국 통상수교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한편,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 등의 소요를 거치며 크게 쇠퇴하여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

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의 신식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보수파의 반발과 서양의 겉모습을 모방하는데 그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선에서의 충돌

 

신흥국가로서, 일본은 그 관심을 조선에 돌렸다.

이는 일본에게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로, 먼저 조선을 합병하여 그 이권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본은 한반도에 다른 나라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해가 되며, 따라서 일본은 수백 년간의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해제하여 조선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석탄과 철광이 일본의 확장 일로에 있는 산업 기반에 도움이 될 것임을 인식하였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 왔으며, 보수파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개화당들은 일본과 서방

국가들과의 연대를 확립하기를 원했다.

 

아편 전쟁과 청불 전쟁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청나라는 약해졌고 서양 열국의 간섭과 잠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를 조선에서 청나라 대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조선의 쇄국주의자와 일본이 관련된 몇 가지 사건과 대립이 있은 후,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

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고, 대외적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야 했다.

 

수구파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서 파견한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재집권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개화파뿐만 아니

라 일본 영사관이 불타고 영사관 위병과 민간인 중에 사상자가 나왔다.

 

이로부터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결국 1885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1.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킨다.

2.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3.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었다.

 

그 사이의 시기인 1884년, 친일 경향의 급진 개화파가 일본군을 이용, 유혈충돌을 통해 몰아내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청나라


북양군(北洋軍)과 북양 함대(北洋艦隊)는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근대화된 청나라 군대의 상징이었으나,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의 정치가들은 조직적으로 기금을 착복했으며, 전쟁 중에도 그러했다.

당시 청나라의 실세인 서태후가 별장인 이화원을 조성하는데 엄청난 금액을 착복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북양함대를 위한 예산이 착복되어 전쟁을 앞둔 청나라 함대에는 사용가능한 포탄이 단 세발이 있었다고 한다.

병참에도 큰 문제가 있어, 만주 철도의 건설도 어려웠다.

 

청나라 군대의 사기는 매우 낮았는데, 이는 급료와 신용이 부족했고 아편을 피웠으며 통솔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며, 이는 요새

화되고 방어할 수 있었던 웨이하이(威海)를 포기하는 등의 불명예스러운 퇴각을 초래했다.

 

일본

 

일본 메이지 정권하의 개혁은 해군의 건설과 효과적인 근대 육군과 해군을 창설하는 데에 중요한 이점을 제공하였다.

일본은 훈련을 위해 군 관료들을 외국에 보내었고, 유럽 육군과 해군의 상대적인 힘과 전술을 평가하게 했다.

 

전쟁 초기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는 다

시 능지처참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에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원세개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大島義昌) 휘하의 8,000 병력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년 6월 9일 이후 인천에 상륙, 7월 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공격·점령하였고,

흥선대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발생 과정

 

1894년 6월 1일,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에 반란군의 진압을 요청하였다.

1894년 6월 6일, 청나라 조정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알렸다. 약 2,460여 명의 청나라 군대가 당일 보내졌다.

1894년 6월 8일, 조선과 청나라는 항의하였으나, 약 4,500명의 일본 군대가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1894년 6월 11일, 동학농민운동 1차봉기 기간이 종료되었다.

1894년 6월 13일,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기회를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였고, 조선에서의 일

                        본군의 지휘를 담당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조선에 남을 것을 전달하였다.

1894년 6월 22일, 일본으로부터의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1894년 7월 3일, 오토리 공사가 조선의 정치 체제를 바꿀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94년 7월 7일,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 간의 중재가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1894년 7월 19일, 일본 해군의 거의 모든 선박으로 구성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전쟁에 대비하여 구성되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 경복궁을 점령하여 새로운 친일 내각을 구성하였다. 새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

                        을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진행

 

1894년 7월,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풍도 해전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아키츠시마(秋津洲)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쳤다.

 

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操江)호와 만나기 위해 아산을 떠나 있었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

(高陞)호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가오슝호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Major von Hanneken)도 승선하고 있었고, 7월 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토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순양함 나니와호가 두 배를 가로막았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로 옮겨탈 것을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다시 돌아갈 것을 원했고,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4시간의 협상 끝에, 토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사격했으며,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국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성환과 평양의 전투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의 천안시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

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3,000 ~ 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

 

1894년 9월 15일,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 ~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1894년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

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황해 해전

압록강 전투 또는 황해 해전은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1894년 9월 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청나라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명,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

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압록강 전투

 

평양에서의 격퇴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북부를 떠나 압록강가의 요새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병력을 보충한 후 10월 10일 빠른 속도로 만주로 진격했다.

 

1894년 10월 24일 밤, 일본군은 몰래 압록강을 건너 부교를 띄웠다.

다음날 오후에는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

 

오후 10시 30분,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야마가타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은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망 4명,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발판을 마

련하게 되었다.

 

가쓰라 다로의 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국군을 쫓아 요동 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

되었다.

 

여순 함락

 

1894년 11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수천 또는 2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요

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

 

우금치 전투

 

동학의병은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하여 수만의 병력이 되었다.

 

이들은 1894년 10월, 관군이 지키던 공주 감영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곧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였고, 11월의 우금치 전투

에서는 1만여 명 중 500명만 살아남는 등 크게 패하였다.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웨이하이 요새 함락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웨이하이의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년 1월 20일 부터 2월 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

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3월 5일에는 잉커우 외곽에

서 전투가 벌어졌다.

 

동중국해 점령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澎湖諸島)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같은 해 3월 29일 가바야마 스케노

리 지휘하에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영역처럼 변히였다.

 

전쟁 종료 및 영향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

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랴오둥 반도·타이완(臺灣, 대만)·펑후 제도(澎湖諸島, 팽호제도) 등을 할양하였으며,

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조선의 명성황후는 이 같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는 일본 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명

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에게 왕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그것을 거부하자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하였다.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관에 치명타

를 주었다.

 

이러한 경향이 이후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또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정한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

어가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들을 약탈

라는 내용을 담은 글을 연일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