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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6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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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서 장군 묘

 

 

김종서, 6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다.

 

 

김종서(金宗瑞, 1383년 ~ 1453년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 무장, 정치가이며 단종의 충신 3 상신(相臣)

중 한명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원적지는 전라도 순천이다.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에 동진사 급제하여,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지냈다.

 

1433년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

년동안 맡았다.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해되어 계유정난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구,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있다.

 

생애 초반

 

김종서는 1383년 (고려 우왕 9년) 충청도 공주 아버지 김추(金錘)와 대사간(大司諫) 배규(裵規)의 딸, 성주 배씨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김종한(金宗漢)이고, 동생은 양주부사를 제수했던 김종흥(金宗興)이다.

 

공적과 관력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고,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

손실(踏驗損實)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고, 같은해 10월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고,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

(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으며,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

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인 그에게 이

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지방의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의 수효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심정하였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짐에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

었다가 이듬해에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면모

 

그는 육진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로서,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책임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개척에서 이룩한 공로로 해서 그를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

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엄정한 면모는 사헌부·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육진개척 당시 시련도 잦았다.

 

부관이었던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導護府使) 박호문(朴好問)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을뻔 했으나, 곧 세종(世宗)에 의해 곤

장을 맞고 끝이 난다.

 

육진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에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한 일 등은 그가 고제

(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실록편찬과 수난

 

세종은 권제(權踶)·안지(安止) 등의 《고려사》 개수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쳐 쓰기

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 뒤에 완성되었는데, 이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출신들이었다.

 

집현전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하여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

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 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은 즉시 그 편찬의 착수

를 명하여 이듬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졌다.

 

같은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

지의 의견을 지지하여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아래서의 의정부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밖에 될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어린 국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의 모든 병권을 장악하여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에 첫 번째로 제거되었다.

 

그뒤 1678년(숙종 4)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절재공 부조전 전교

 

절재공에게 부조전을 하사한 전교(傳敎)이다.


병오(1786,정조10년)년 12월22일에 좌의정이 임금께 아뢰었다.


"금년 가을에 한 선비가 백악산 기슭에서 한쪽 기퉁이가 노충된 옥함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단종조에 상신 김종서

의 신주이었다 하오이다".

 

정조 임금께서 영의정 김치인과 좌의정 이복원에게

 

"절재공 충익에게는 후손이 있다고 하니 특별히 부조전을 명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한대 의향이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이복원이

 

"옛 상신이 육진을 개척한 공이 매우 크고 충절이 탁월하니 부조를 특허하는 것이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 하옵

나이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정조 10년 (1447년) 12월 22일, 정조실록

 

6진 개척

 

남부 만주지방에는 만주족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하여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에는 영변 이북지방으로 조선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조선이 안정되면서 국토가 침탈될 상황

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함경도 관찰사였던 김종서장군은 당시 방문중이였던 황희정승과 함께 압록강 주변을 둘러보던중 북방오랑케의 암살자들 열

명에게 기습을 당하였다.

 

김종서 장군의 증언은 이러하다

 

" 소인이 왼쪽팔에 화살을 맞고 쓰러져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같이 있던 정승께서 놀랄 겨를도 없이 기

습한 오랑캐들을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 칼을 맞대고 있던 오랑캐의 뒷덜미를 끄시고 목을 맨손으로 뽑아 죽이셨습

니다.

소인도 믿기 어려운 일이란 걸 알지만 전하께서 항시 정승을 옆에 두신다면 어떤 암살자도 전하를 해하지 못할 것

입니다."

 

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지는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였는데,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흉년으로 인해 국내문제 해결에 급급하는 조정을 반박하며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백성이 굶주리고 나라재정이 바닥났다고 하여 오랑캐가 쳐들어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여진족이 뭉쳐서 군사가 일만이 되면 망한다고 경고한 사람이 있는데도 요나라는 여진족에 대한 아무런 방비를 하

지 않다가 패망 했습니다."

                                                                                       — 김종서, 세종 29년 (1447년) 7월 27일, 세종실록

 

결국, 세종 15년(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년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세력을 정벌시키면서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이후 동년 10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알목하의 추장인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죽는 등 내부적인 여진

족의 분열이 있었는데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

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 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평가와 비판

 

평소에 김종서는 휘하 병사들에게 잡일을 많이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김종서는 태종과 세종, 문종, 단종을 모셔온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위세는 왠만한 권신들도 잡지 못할 만큼이었으며, 의정부서사제를 명분으로 만천하를 호령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그의 위세는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이 세손(단종)을 정사에 능한 원로대신에게 위탁하려는데 황희는 이미 아흔 살의 고령이라 그나마 일흔의 김종서에게 의

탁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黃喜)는 이 때를 내다보고 김종서를 길렀으나 정권을 무리하게 행사하였음을 생각치 못하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하여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고,

'성상위에 좌상'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가령 김종서의 전횡에 대한 기록을 보면,

 

' 황보인이 조상의 묘(墓)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갈 때 전송하는 자들이 구름과 같이 많았으나, 김종서가 갈 때보다는

많지 않았다'.라는 것과 사위와 아들이 '특진'제도 때문에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소극적인 황보인과, 황보인과 김종서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정분에 의해 결국 주요 결정은 좌의정에 몫이었고, 그

만큼 위세가 높은 것이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만천하를 호령한 그지만, 절대로 남용을 목적으로 잡은 정사가 아니였고 그 때문에 수양대군도 김종서를 바

로 헤칠수 없었다.

 

그의 섭정은 황보인과 정분등 정승들과 당시의 6판서들의 존재를 무시한다라는 평가도 있다.

3정승 체제에 정승들도 견제를 받을 만큼 누가 독단을 펼치기 어려운 정치구조로 됬을 만큼 세력을 잡고있었다.

 

그러나 전횡과 독단으로 인해 김종서가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 등은 전혀 없다.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쓴 단종실록에서도 그가 서대문 밖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보이질 않는다.

 

어런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서 절도를 잘 지켰음을 보여준다.

 

문학 작품

 

김종서가 무장으로 유명하나, 원래는 문과에 급제한 문인이다.

그는 안평대군의 시회에 참석하여 '몽유도원도시축'에 오언고시를 남겼다.

 

문신으로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등의 간행에 힘쓰기도 하였다.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셕은 져 션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더타, 능연각(凌練閣) 상(上) 뉘 얼골을 그릴고

 

삭풍(朔風)은 나모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듸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집고 셔셔
긴 바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거시 업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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