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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평가, 신숙주와의 비교, 성삼문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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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평가, 신숙주와의 비교, 성삼문의 시조

 

성삼문의 평가

후일 남효온의 사육신전 등을 통해 성삼문은 충절, 절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작가인 이광수의 단종애사 등은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한국의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는데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申叔舟)분노한다는 것이다.

 

성삼문의 글

 

다음과 같은 시조가 전한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영해당(詠海棠

子固不能詩(자고불능시) / 그대는 본래 시를 짓지 못하나니
不能亦何傷(불능역하상) / 짓지 못하니 어찌 마음 아프겠는가
我愛柳中郢(아애유중영) / 나는 유중영을 좋아하니
夜不喜薰香(야불희훈향) / 밤에도 향기를 기뻐하지 않노라   — 성삼문

 

신숙주와의 비교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올바른 현실을 위해서 잘못된 현실은 현실로 보지 않았다.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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