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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왕위를 교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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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왕위를 교체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 이역(李懌)이 옹립된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경연(經筵) 폐지·신언패(愼言牌) 실시·성균관(成均館)의 연락(宴樂) 장소화·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언문 도서의 폐기  등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원각사를 폐하여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치고, 흥청(興淸)들과 기거를 함께하며, 채청사(採靑使)를 각 지방에 보내 미를 끌어들이고,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자, 이에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전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고,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정,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 등은 훈련원에서 무사를 규합한 뒤,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뜻대로 왕위를 교체한 사건으로, 조선왕조 개창 이래 장자(長子) 상속의 왕위세습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반정 자체가 철저하게 신하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중종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고, 집권 초기 권력은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중종반정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산군대에 공직에 있던 인물이 왕을 교체한 후 다시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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