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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광해군의 형으로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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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광해군의 형으로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다.

 

 

임해군 이진(臨海君 李珒, 1572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609년 6월 3일(음력 5월 2일))은 조선의 왕자이다.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형이다.

 

공빈 김씨 소생이며 성은 이(李), 이름은 진(珒)이고 초명은 이진국(李鎭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임진왜란 당시 순화군과 함께 왜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났다. 후일 광해군의 즉위 후 유배지 교동에서 사망했다.

 

생애

 

선조의 서장자로, 공빈 김씨의 소생으로 1572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임해군이 6세 때에 어머니 공빈을 잃었다.

 

1585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때에는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결국 1592년 7월 23일,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

에게 넘겨졌다.

 

(회령의 변고)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풀려났으나, 방탕하고 포악함과 난폭함 등 성격에도 문제가 있어,결국

임해군은 선조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던 외조부 김희철도 임진년에 전사했다.

 

또한 양사는 임해군이 임란 이후에도 민가를 약탈하거나 공물을 횡령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이유로 파직시켜야 된

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역모 혐의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하는 해에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 에 따라 진도에 안치됐다가 교동으로

유배됐다.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

 

사후

 

임해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임해군의 죽음을 병사 라고 보고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재조사에 들어간 결과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임해군은 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었다.

 

자녀 억류설

 

임해군의 자녀들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억

류된 왕족은 임해군과 순화군 이며 사료에 왕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으므로 자녀 억류설은 사실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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