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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실학사상을 주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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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실학사상을 주장하다.

 

박지원(朴趾源, 1737년 3월 5일(음력 2월 5일) ~ 1805년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으며,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과거에 여러번 낙방한 후 학문 연구와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 즉위 후 여러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며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정치활동과 낙향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그는 일찍이 양반 사대부가 하는 것 없이 무위도식하는 것과 북벌론을 호언장담하면서 폭이 깊고 소매가 긴 옷을 입는 것과 무예연습을 하지 않는 점을 풍자했다. 그러나 평민들과 하층민조차 양반관료나 재력가에게는 비굴하게 행동하면서 자신보다 지체가 낮거나 미약한 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평민과 하천에 대한 동정심도 거두게 된다.

1767년아버지 박사유가 사망했다. 백면서생으로 관직에 나가지 못했던 아버지 박사유는 늦은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올랐지만 통덕랑에 머물렀다.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가난하게 살던 형에게 모두 넘기고 근처 반송방 내에 분가하였다.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그들과도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후일 박제가, 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도 만나 이용후생

(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770년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지만, 회시에 백지 답안지를 내고 나왔다.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정조의 측근의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1780년(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있을 때 그는 물레방아를 관찰, 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귀국할 때 가져왔다. 그는 물레방아를 수차(水車)라 했고, 여러개의 모사본을 그렸다가 11년 뒤 안의현감이 되어 함양 땅에 물레방아를 설치한다. 베이징, 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그해 10월 27일 귀국하였다.

 

북학파 활동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류(서자)들을 금고하는 것은, 옛날의 법에서 상고해 보건대 그런 법이 없으며, 예률(禮律)에서 상고해 보건대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초에 좀스러운 신하가 기회를 틈타 앙갚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디 개국했을 때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1백 년 뒤에 선묘(宣廟)께서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인묘(仁廟) 때에 미쳐서 또 삼조(三曹)에 허통시켰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열성조에서 고치고 변통한 성대한 뜻을 단연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선대에 조광조, 이이, 송시열이 서자들도 요직에 쓸 것을 건의했던 점을 계속 지적, 상소하여 서자들에게도 관직에 나갈 길을 줄 것과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

 

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또한 평민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환경을 지적하여 평민들에게도 과거를 보도록, 나라에서 서당에 보낼 것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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