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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왕건에게 항복하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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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왕건에게 항복하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다.

 

경순왕(敬順王, 901? ~ 978년 5월 13일 (음력 4월 4일), 재위: 927년 ~ 935년)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다. 성은 (金)씨, 이름은 (傅)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문성왕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 그는 경명왕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본래는 신라의 왕족이었으나 이종 6촌 형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9년만에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줄 것을 결정하였고, 태조 왕건에게는 자신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 등 태조 왕건의 딸 2명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한편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927년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이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같은 해 927년부터 935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그의 능은 신라의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

왕위에 오를 무렵 이미 그는 죽방부인 박씨(朴氏)와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등의 부인에게서 여러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죽방왕후에게서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 또는 金溢)과 아들 김익(金謚), 김굉(金鍠, 신라멸망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된 범공(梵空)), 대안군 김명종 등의 아들과 딸 덕주공주(德周公主) 등을 두었다. 또한 소실인 별빈 순흥안씨(別嬪 順興安氏)에게서 학성부원군 덕지(鶴城府院君 德摯)가 있었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피살되고,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 배경은 미상인데,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경명왕의 자녀들이 미성년자였는지 그가 화백 회의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효종랑을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할아버지 실홍(또는 관홍)을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 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수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그는 태조 왕건에게 자신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소개했는데, 그는 고려 태조의 신성왕후가 된다.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이에 마의태자(김일), 범공, 이순유 등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고려에 귀순을 결심했을 때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두 딸인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와 부인 왕씨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냈다. 낙랑공주는 신명순성왕태후 소생이고, 부인 왕씨는 평주 호족 박수경의 딸 성무부인 소생인데, 성무부인의 딸은 딸밖에 낳지 못하여 작위를 받지 못했다. 낙랑공주는 그에게서 대안군 김은열과 신란궁부인 김씨, 그리고 황경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대안군 김은열의 딸은 이허겸에게 시집갔는데, 외손녀사위가 김은부이고 외증손자는 이자연으로 현종문종 때의 외척이 된다.

이후 정승공(政承公)에 봉작된 뒤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고 지금의 과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 한편 경주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태조 사후 혜종, 정종, 광종을 거치는 동안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숙청을 모면하고 경종대에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딸인 헌숙왕후경종의 정비가 되었는데, 경종은 특별히 장인을 배려하여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978년 4월 4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에 안장되었다.

고려에서 경순왕의 시호를 올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고려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년) 다시 되찾아 정비하게 되었다.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崇惠殿),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敬天廟) 등에 제향되었다. 현재의 경순왕릉비는 영조 23년(1747)에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 10월14일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 김응호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한다. 여기서 수치란 고쳐 새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1748년 1월29일에는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해서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한다. 이렇게 해서 경순왕릉은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었다.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인근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인 김빈(金礗)과 김굉 등이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74년 이 비는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73년 이후 이루어진 경순왕릉 정화에 따라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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