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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죽여 큰 공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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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죽여 큰 공을 세우다.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었으며, 1232년 몽골 침입 때 처인성(處仁城)에서 몽골 장군 살리타(한국 한자撒禮塔)를 살해했다.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 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켰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이 되고 기타 공 있는 자는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상을 받았다. 뒤에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원종 때에는 추밀원 부사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가 되었다.

 

지워진 기록

김윤후는 몽골 항쟁에 공을 세웠으나,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다. KBS 한국사전에 따르면, “몽골 침략으로 인해 고려의 전 국토는 초토화 됐고,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으로 추락해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세기 동안 원의 간섭을 받게 된다”라며 “이 기간 동안 몽골에 대한 항전은 곧 반역과 모반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라고 설명했다. 비슷한 경우로 삼별초 장군 김통정도 모두 반란자로 치부되었다.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에는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돼지를 맞혀 죽여 황성에서 몽병을 물리쳤으니 (金允侯一箭豕退蒙兵於黃城)’라는 기록이 다시 등장하여 기술되는 등 조선 시대 후기부터 조금씩 조명되었다. 김윤후(金允侯)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승려의 신분으로 몽골군 원수 살례탑(撤禮塔)을 죽이는 등 여몽전쟁(麗蒙戰爭) 때에 전공(戰功)을 세웠는데, 그의 가계와 생몰년도는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김통정과 마찬가지로 같이 본성과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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