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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화랑도의 지도자, 자발적으로 조직해 애국운동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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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화랑도의 지도자, 자발적으로 조직해 애국운동을 전개하다.

 

화랑도(花郞徒) 또는 낭가(郎家), 풍류도(風流徒),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는 신라의 청소년 심신 수련 조직이다.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졌다. 조직의 지도자는 국선(國仙)·화랑(花郞)·원화(源花 또는 原花)·화주(花主)·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나 ‘화랑’(花郞)이 보편적인 칭호이다.한국 고유의 사상과 도교, 불교, 유교가 합해진 이념에 따른 일종의 심신 수련 단체로 국가 차원에서 조직하거나, 지원하였다. 화랑화랑도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라 추측되고 소속된 청년들을 낭도라고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랑의 제도적 설치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576년(진흥왕 37)의 기록으로서, 이 해에 진흥왕은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게 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아 3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다 한다. 이들 두 여자는 질투 끝에 준정남모를 살해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서 화랑 사다함(斯多含)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어 화랑도의 기원을 훨씬 앞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따라서 화랑도의 기원은 학자에 따라 두레, 혹은 《조의선인》(皁衣仙人) 등을 내세우고 있어 아직 정설이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화랑도가 우리 고대 사회에 있어 독특한 형태로 발생한 것만은 사실이다.

삼국 전체에 행해 오던 우리 고대 사회의 독특한 기풍, 혹은 종교가 특히 신라에 와서 화랑도로 정립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씨족 제도가 오래 계속되었으므로 상호 부조의 협동정신이 강했고, 씨족원 사이에 일족(一族)의 명예를 중히 여겨 일신(一身)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 기풍이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같이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을 숭상하는 국민적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에 비해 후진 국가였던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국가 민족의 수호를 이념으로 하여 궐기한 청소년들이 화랑도, 혹은 적당한 명칭의 단체를 자발적으로 조직해 애국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사다함과 같이 뛰어난 인재들이 출현해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게 됨으로써 국가에서도 이에 대한 정책으로 국가 직속 체제하에 단합시킨 것으로 본다.

화랑도의 이념은 오로지 개인의 수양과 단련을 통해 국가에 봉사였으므로, 서로 도의를 닦았고[相磨以道義], 가악을 즐겼으[相悅以歌樂],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遊娛山川, 無遠不至] .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준수했다. 경문왕(景文王)의 고사에 관련되었듯이 ① 겸손하고 ② 검소하고 ③ 방자하지 않는 삼이(三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세속오계는 화랑도의 지침으로, 진평왕승려원광수나라에서 수행을 하고 돌아와서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의 요청으로 내린 다섯 가지 계율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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