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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풍대군, 이성계의 이복형,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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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풍대군, 이성계의 이복형,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다.

 

완풍대군(完豊大君, 1330년 ~ 1388년 10월 23일) 또는 완산군(完山君)은 고려 시대 후기의 무신·군인·관료·시인 이며 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으로 이름은 이원계(李元桂)이다. 그는 일찍이 무과와 문과에 모두 급제를 하였으며 홍건적의 난 이후 두 차례의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였고, 군 원수로서 이성계, 변안렬 등과 함께 왜구의 침공을 물리쳤다. 고려의 충신이던 그는 이복 동생 이성계위화도 회군에 반대했으며, 이성계고려를 멸망시키려는 뜻을 알고 절명시를 남긴 뒤 음독자결하였다. 생전의 작위는 척산군(陟山君)과 완산군(完山君)으로,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시킨 공로로 척산군에 봉군되었고, 뒤에 다시 완산군(完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사후 고종 즉위 후 1872년(고종 9년) 완풍대군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은 그의 장인이고 '물레를 만들었다는 〈문내(문래)〉'와 〈문영〉 형제는 그의 처조카이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생애 초반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며, 아버지는 환조 이자춘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일찍 모친을 여의었는데, 아버지 이자춘의 정실 의혜왕후 영흥 최씨는 어머니 외가의 성을 따라서 아버지 조조는 성을 최씨로 이름은 한기로 하여 영흥 최씨로 하였다 곧 태조 이성계의 생모가 된다.

 

홍건적 토벌과 야인 격퇴

 

왜구 격퇴

이어 이듬해에는 나세의 휘하로 종군, 강화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1380년(우왕 6년)에 왜구가 또다시 광주능성·화순 두 현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최공철과 함께 나가 전라도 방어의 임무를 맡았다. 호남을 침략한 왜구를 막았고, 그해 왜구가 충정·전라·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을 하자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출전하여 3도도순찰사인 이성계를 도와 남원(南原) 운봉(雲峰)에서 크게 왜구와 싸워 승리하였다. 그 해 황산 대첩에서 이성계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8년 요동 정벌 때에는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서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 그는 동생인 이성계위화도 회군에는 반대했다. 1388년 요동 정벌(遼東 征伐) 때에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가 회군 5개월 뒤에 죽었다. 1390년(공양왕 2년) 회군공신에 책록되었다.

 

죽음

이원계(李元桂)는 환조 이자춘이 한산 이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자춘의 맏아들로 1330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1335년에 태어난 이성계(李成桂, 1335년 ~ 1408년)는 이복 형으로 깍듯이 대접하였다. 고려 말기의 당시에는 정실부인(본부인)과 둘째부인의 구별만 있을 뿐 서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원계는 한산 이씨에서 나온 장남으로 정실 부인의 아들이었고 이성계는 두번 째 부인 소생의 아들이었다. 태조에 이르러 권신인 하륜과 이숙번의 왕실 족보 조작으로 인하여 정실 부인인 한양 이씨를 측실로 조작하여 기록하였고 이는 왕통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작으로 볼 수가 있다. 이에 근거로 목은 이색의 구신도비문과 동문선 15권과 119장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원계의 동생인 이천계와 원계의 아들 이양우는 태조의 족보 조작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바 있어 조정에 불경죄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후 환조 이자춘의 장남 이원계는 고려의 충신으로 형제간의 우를 범할 수 없어 그 유명한 절명 유언시[1]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는 고려 충신이었던 공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켜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서 충효를 다 하여라.” 유언하고, 유시(遺詩)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후일 이원계가 남겼다는 절명시 한 수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三韓故國身何在 삼한고국신하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원종백중유)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동처휴운재처이)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荊蠻不必海桴浮 형만불필해부부)

이 시는 1908년(순종 2) 18세 종손 철재가 진정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에 음각되어 있어서 재확인 되었다. 묘는 함경남도 함흥의 아버지 이자춘의 묘소인 정릉(定陵)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공은 처음에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고 오랑캐 토벌과 왜구 토벌의 혁혁한 전공으로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에 올랐다. 태조고황제는 등극 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이란 시호를 내렸다.

 

사후

아들 이양우와 완산부원군 이천우조선의 개국공신이었다. 1901년 북청(北靑)의 삼의사(三義祠)와 1909년 함경남도 이원(利原)의 선원사(璿源祠)에 배향되었다. 사후 고종즉위 후 태조 이성계의 4대조를 추존하는데, 왕자의 예에 따라 증직을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하여 1872년(고종 9년) 완풍대군으로 추봉하였다. 따라서 완풍군, 완산군, 척산군 등은 그의 생전의 작위였다.

 

기타

딸은 여러 명이었는데 이원계의 맏딸은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장담(張湛)에게 시집을 갔다. 둘째는 변중량(卞仲良)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유정현(柳廷顯)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홍로(洪魯)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변처후(邊處厚)에게로 재가하였다. 태종은 재혼 여성의 자손을 출사를 금지시켰지만 이복 백부 이원계의 딸들에게는 예외를 적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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