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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 사림으로 부터 변절자로 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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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 사림으로 부터 변절자로 몰리다.

 

남곤(南袞, 1471년 ~ 1527년 3월 10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정치인,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초기 사림파 정치인이었으며 성리학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사장학과 경서 해석에도 재주가 있었다. 자(字)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지족당(知足堂)·지족(知足),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사림파 출신 인사 중 김전 등과 함께 심정·홍경주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묵인, 동조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의정부좌찬성우찬성, 예조판서를 거쳐 기묘사화 이후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의정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림파의 일원으로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복귀했다. 그 뒤 김전과 함께 신진 사류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1519년 훈구파와 손잡고 기묘사화에 협력하여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 방조하였으나, 남곤도 김종직 학파의 한사람이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청렴하였으나, 조광조 등을 처형하는 데 동조, 묵인했다는 이유로 사림의 집권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사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자와 변절자로 몰려 지탄을 받았다.

후일 그의 외손자 송인조선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의 부마가 되었다. 그의 고모부는 임원준이고, 경상남도 출신이다.

 

갑자사화와 유배

연산군 즉위 후 그의 고종사촌형인 임사홍은 연산군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촌형인 임사홍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멀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6월에 훈구파인 임사홍과 신수근 등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찍이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폐위하여 사사(賜死)하게 한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여 왕을 격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갑자사화가 발생하여 그는 출사를 박탈당한다.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 하자 사림파 관료들은 선왕(성종)의 유지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분노한 연산군은 생모 추숭작업을 계속하던 중, 유자광, 신수근, 임사홍 등은 생존해 있는 폐비 윤씨의 생모 거창군부인 신씨를 찾아내 연산군과 만나게 한다. 모친의 죽음에 분노한 연산군은 학살을 감행한다(갑자사화)

폐비 사건에 참여했거나 관련된 윤필상, 성준, 이세좌 등을 사형시키고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이 부관참시당한다. 남곤 역시 폐비 윤씨의 복위는 성종의 유지에 어긋난다는 발언을 했다가 연산군의 눈밖에 나게 되고, 금고형에 처해진다.

유배지에서 그는 시문과 사서 삼경으로 시름을 달랬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성리학을 전파한다.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로도 그의 성리학적 도덕적 이상향 구현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으나, 신중한 성격으로 변모했고 온건론과 점진적 개혁론자로 변모하게 된다. 1506년(연산군 12년) 초 박원종 등으로부터 반정 거사에 동조하라는 의사가 그에게 타진된다. 연산군을 패륜아로 생각한 그는 중종 반정 계획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반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종 반정이 성사된 직후 석방되어 바로 한성으로 귀경하였으며, 그에게도 공신의 서훈이 내려졌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중종 반정과 복귀

1508년(중종 3년) 10월 29일 겸(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 남곤은 글재주가 뛰어나서 당대를 대표할만한 문사(文士)로 인정받았는데, 성리학자 중에서도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을 사림파(士林派)와 사장파(詞章派)로 분류하면 남곤은 김일손, 표연말(表沿沫), 박한주(朴漢柱), 유호인(兪好仁), 권오복(權五福) 등과 더불어 사장파로 분류된다.

이후 이조참판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한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1509년(중종 4년) 6월 6일 특진관(特進官)으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외직으로 나갔을 때 그는 선정을 베풀어서 치적을 쌓고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할때에 소금을 전매(專賣)하여 국비(國費)로 할 것을 장계(狀啓)하였다. 그해 9월 행첨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 춘추관사를 거쳐 1510년 문한(文翰)의 일인자로 인정받고 호조참판(戶曹參判),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10년(중종 5년) 8월 29일 호조참판이 되고, 1511년 4월 27일 병조참판(兵曹參判), 사헌부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좌의정 정광필의 천거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3년(중종 8년) 6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使)가 되고 그해 9월 다시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관료 생활

1514년(중종 9년) 10월 27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올랐다. 그해 국경까지 마중나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고 이어 호조판서와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515년 4월 25일 다시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었다가 1516년(중종 11년) 4월 25일 좌참찬(左參贊), 1516년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에 겸임되었다.

1515년 우참찬으로 재직 중 영의정 유순정 등과 함께 박상(朴祥), 김정 등의 단경왕후 신씨(愼氏)의 복위상소(復位上疏)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다른 김종직 학파 사람들은 중종 반정 공신들과 함께 단경왕후 복권을 반대하는 남곤과 유순정을 타락한 변절자라며 규탄한다. 그해 6월 안당 등과 함께 조광조 등 신진 사류를 적극 추천하여 발탁했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1517년(중종 12년) 8월 22일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1518년(중종 13년) 6월 28일 의정부좌찬성으로 있을 때 속동문선(續東文選)을 찬수(撰修)하는데 참여하였고, 예조판서가 되었다. 뒤에 의정부 좌찬성으로 승진했다가 우찬성을 거쳐 행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8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나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이때 부사(副使)로 함께 갔던 이자(李滋)가 정사로 갔던 남곤이 병을 얻어 죽을지경에 있을때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 시켰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에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1518년(중종 13) 찬집청당상으로 신용개·김전 등과 함께 《속동문선》을 편수하는데 참여하였다.

1518년 중종은 변방에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는 여진족 속고내를 토벌하기 위한 토벌대를 편성, 이지방방어사로 임명하여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광조 등은 비밀리에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속임수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유담년은 속임수보다 사람과 가축이 상한다는 이유로 반박하였다. 사림파 인사들은 모두 조광조의 편을 들었지만, 그는 조광조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해 5월 15일 조선 각지에 지진이 발생하자 예조판서로, 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 수습을 주관하였다.

조광조는 유자광은 패악한 인물이고 심정은 심보가 바르지 못한 인물이며, 그들이 조정의 권력을 차지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고 규탄했으며 이들을 숙청하고 부패한 반정, 훈구 공신들을 축출해야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때 남곤 역시 소인배라고 비판했는데, 이 말이 남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남곤은 훈구파가 조광조 일파를 공격할 때 도움을 주지 않는다.

 

개혁 견해의 차이

그는 김전 등과 함께 사림파 소속이었다. 그러나 조광조, 김식 등의 급진적인 개혁책에 김전 등과 함께 반대하고 나섰다.

개혁의 방안을 놓고 남곤은 조광조와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조광조가 '문학은 선비의 일이 못 되며, 경전 공부에 전념토록 하자'고 하면, 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했고, 김숙자가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활쏘기를 가르쳤던 점도 지적했다.

인물 천거제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지자 남곤은 양자를 절충, 과거 제도도 존속시키되 과거제를 보완해 천거로도 일부 관리를 뽑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과거제를 천거제로 대체해나가야 된다고 했다. 남곤의 미온함을 두고 조광조 일파에서 “남곤은 소인이다”라는 비판이 점점 커져 갔다. 한편 김전은 인물 천거제를 반대하였다. 훈구파들에게 받는 의심보다 조광조 일파의 공격이 그에게 타격을 주었다.

 

기묘사화에 참여

 

조광조 구명 실패

조광조일파가 유배되자 11월 19일 그는 이조판서직을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훈구파 대신들은 조광조의 유배에 만족하지 않고, 유배지 능주(綾州)에서 조광조를 사사케 했고, 이때 그는 조광조를 변호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훈구파 출신으로 사림파에게 동정적 입장이었던 유운을 적극 천거하여 사헌부 대사헌에 앉혔다. 이후 정광필, 안당 등과 더불어 조광조 일파에 대한 온건한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2월 19일 왕이 조광조에게 사형을 시키려 하자 사형보다는 인덕으로서 다스리기를 청하다가, 중종이 강경 대응을 시사하자 유배선에서 마무리 지을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중종에게 거부당한다. 조광조, 김정 등이 사사된 직후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가리켜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평해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기묘사화에 참여, 협력한 신하들에게 공신과 원종공신 서훈을 내릴 때 자신에게 내려진 공신책록을 거절하였다.

 

신사무옥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후에 훈구파의 영수인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할 때 배신자, 변절자로 지목된 남곤, 김전 역시 제거하려 모의하였다.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남곤, 심정 제거 모의는 송사련의 밀고로 탄로났다. 신사무옥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권력 장악과 퇴출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에 대한 도의적 책임감으로 그는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일로 승진, 여러 벼슬을 거쳐 1520년(중종 15년) 1월 13일 의정부좌의정이 되어 우의정 심정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였다가 겸 세자사부(世子師父)가 되었다. 이때 그의 첩 조운(朝雲)은 그에게 시골로 같이 낙향하자고 권고한다.

 

증남곤(贈南袞)

富貴功名可且休 (부귀공명가차휴) / 부귀와 공명 이걸로 충분하니
有山有水足遨遊(유산유수족오유) / 산에서 물에서 즐겁게 지내는게 어떠할까
與君共臥一間屋(여군공와일간옥) / 단칸 방 하나이면 그대와 함께 눕기에는 족하니
秋風明月成白頭(추풍명월성백두) / 가을바람 밝은 달과 오래도록 삽시다.

 

그러나 그는 낙향하지 않았고, 1523년(중종 18년) 4월 18일 의정부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심정과 함께 중종의 사돈인 김안로를 공격, 탄핵하였다. 1527년 병이 위중하였으므로 중종에게 사직요청을 여러차례 하여 벼슬에서 체직된 뒤 얼마 후 사망하였다.

 

은퇴와 죽음

그는 관직에 투신했으면서도 동시에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한사람이라는 오명과 함께 만년에 자신의 실수를 자책(自責)하고 자신의 글로 인하여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제자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내 글을 전파 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고 했고, 또 "내가 죽은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을 하지 말라 ",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를 청(請)하여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한 뒤 평생의 사고(私稿)를 불태웠다. 또한 훈구파의 조광조 제거를 방조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면서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글을 태워라, 나는 후대에 글을 남긴 자격이 없다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1527년(중종 22년) 3월 10일에 병으로 사망하니 당시 향년 57세였다.

만년에는 자신의 일을 자책하고 자신의 문서가 훗날 화가 될까봐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평생 써놓았던 글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1527년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라 하였으나 후에 추탈된다. 문집에는 《지정집》, 저서에는 《유자광전》, 《남악창수록》 등이 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은현면(隱縣面) 봉황암(鳳凰岩) 인좌(寅坐)에 안장되었다. 심정이 김안로를 제거하려다가 역공격을 당하여 숙청당한 뒤, 그의 영향력하에 있던 문무신들도 대부분 파직되어 몰락했다. 사후 문경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나 1558년(명종 13년) 관작과 시호가 삭탈되었고 심정, 홍경주와 함께 기묘삼흉이라 불렸다.

1567년(명종 21년) 명종의 임종 직전 다시 작호를 회복하였으나 선조 즉위 후 다시 관작을 추탈당했다. 사림파의 일원임에도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반대한 점과 새로운 사림의 영수 조광조를 제거할 때 도와주지 않고 훈구파의 살육을 수수방관하였기 때문에 희대의 배신자이자 파렴치한 역적으로 묘사되었다.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은 고종 즉위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들이 없고 서자 1인과 딸들이 있었으므로 그의 사후 그에 대한 복권여론도 없었다. 이후 그는 훈구파로 몰려 단죄되었으며, 그가 김종직의 문하생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1910년(융희 3년) 이후부터였다. 그의 외손 송인(宋寅)은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사천서원정절사에 배향되었고, 1995년 문중에서 지은 충모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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