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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상왕으로 물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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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상왕으로 물러나다.

 

정종(定宗, 1357년 7월 18일 (음력 7월 1일) ~ 1419년 10월 15일 (음력 9월 26일), 재위: 1398년 ~ 1400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이(李), 초명은 방과(芳果), 는 경(曔), 본관전주(全州), 는 광원(光遠)이다. 1398년부터 140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아우인 정안군(훗날 태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선양한 뒤에는 아우 태종인문공예 상왕(仁文恭睿 上王)으로 존호(尊號)를 올렸고, 사후 조선 중후기까지 시호인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다.

 

생애

정종은 공민왕 6년(1357) 7월 18일(음력 7월 1일)에 태조 이성계와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태조 이성계를 도와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왜구(倭寇, 왜나라 출신 도둑떼 무리)를 토벌하는 등 왜구 격퇴 공적을 세웠다.

 

조선 개국

조선 태조 1년 (1392, 36세), 부친 이성계조선을 건국하자 정종은 영안군(永安君)으로 책봉되었으며,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절제사(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조선개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은 계속되어 아래로는 왜구(倭寇)가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고, 위로는 명(明)나라로부터의 압박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영안군 이방과는 1393년문화현(文化縣, 황해남도 신천군), 영녕현(永寧縣, 평안남도 녕원군)의 두 현에 출군하여 왜구(倭寇)를 물리쳐 공훈을 세웠다.

태조 3년 (1395, 39세), 태조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개편하고 여기에 10위를 중, 좌, 우의 3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 대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였는데 영안군 이방과는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경기좌우도 및 동북면 관할)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영안군 이방과는 병권에 관여케 되었고 요동 공격을 위한 훈련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정도전, 남은, 성석용(成石瑢) 등이 국내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명나라로부터의 압력을 물리치기 위해 요동을 정벌할 것을 청한 데에서 나온 조치였다.

 

즉위

태조 6년(1398, 42세), 음력 8월에 동생 정안군(당시 32세)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영안군은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鎭安大君)은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종은 우왕 3년 (1377년) 때부터 21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군인 출신이며, 일찍이 정안군(태종)이 창업 대의 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직접적으로 동생 정안군(태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하는 등 왕위에 관한 관심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치세

 

정종 원년 (1399)

3월에는 한양에서 개성으로 천도하였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적(經籍) 의 강론을 담당케 하였다.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간행하였고,

8월에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관인들이 권세가에 청탁하는 것을 방지하였고, (정·경 분리)

11월에는 법전을 정비하기 위하여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태조 때 펴낸 《경제육전》을 준수하여 치정할 것을 교시, 즉위교지(卽位敎旨)의 내용)

 

정종 2년 (1400)

2월에는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4월에는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1차 군·정 분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의정부(議政府, 최고정무기구)로,

중추원(中樞院) → 삼군부(三軍府, 군무)와 승정원(承政院, 정무:왕명출납 등)으로 분리, 개편하였다.

참고로, 2차 군·정 분리(중서문하성 폐지) 개혁은 태종 원년(1401)에 시행되었다.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환원시켰다.


정종은 왕자의 난을 이유로 수도를 한성에서 개경으로 옮겼으나 다음 해인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정안공왕세자로 책봉하고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맏형으로서 남아있는 형제들간의 반목을 일소하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재위중에는 형제간의 친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재위중에, 삼성(三省)이 회안대군을 탄핵하기위해 논의하려 할때, 동모제(同母弟, 친동생)의 형친(兄親)의 정으로서 논의를 미연에 차단 금지시켰다. 이후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仁德宮)에서 거주하면서 사냥과 격구, 연회,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세종 1년(1419) 음력 9월 26일에 63세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사후

사망한 뒤 국상을 치를 때에도 왕의 국상은 후대왕이 상주가 되어야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계승자인 정안군(→태종)이 아닌 장자(長子)인 의평군 이원생(義平君 李元生)이 섭상주(攝喪主:대리상주)가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바로 순효라는 시호를 올려 순효대왕(順孝大王)이라 부르다가 명나라에서 공정이라는 시호를 올려 가져오자 이때부터는 묘효 없이 공정대왕(恭靖大王)이라 불렀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사후 250여년 만인 1681년, 제 6대 단종과 함께 제 19대 숙종 7년에 정해졌다. 정종(定宗)의 의미는 '태조의 업적을 계승하여 정국을 잘 다스렸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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