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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수은에 중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독살설이 제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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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수은에 중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독살설이 제기되다.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1777년(정조 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괴한이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들어났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였다.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해, 홍상범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며, 홍계능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하였던 세력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뿐 모두 제거 되었다. 이후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다시 도승지로 올렸고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하였다. 전례가 없던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막강한 실권쥐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업고 모든 정사에 관여하여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홍국영의 이러한 득세는 실권을 쥔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 초기 반대 세력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홍국영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6월 23일 정후겸과 홍인한의 수하였던 윤약연, 홍지해 등을 친국하면서 노론이 홍영을 제거하려고 한 시도에 대해 세손시절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수가 또한 몇 달인지를 알 수 없었으니, 저궁의 고립과 위태함이 어떠했

국가 사세의 간난(艱難)함이 어떠했겠는가?”

 

라며 오직 홍국영자신을 보호하였다고 언급하면서 “홍국영에 있어서는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임금의 몸을 보호해와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이 사람을 장해(狀害)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즉조(卽祚)한 이후 …… 오직 이 하나의 신하를 의지하여 믿고 있는데 기필코 장살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장차 어느 지경까지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여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홍국영은 사사로운 관계에 따라 인사를 전횡하는가 하면,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는 할머니되는 정순왕후가 독단적인 한글 전교를 통해 후궁을 간택한다고 하자 자신의 누이를 원빈으로 들이는 등 무리한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다.원빈이 후궁으로 간택된 지 1년만에 죽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고 공공연히 “나의 외조카”라고 불렀다.

홍국영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원빈이 왕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어 이를 보복하려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다가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원빈이 죽자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을 함부로 국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憺)을 앞세워 왕위계승권에 관여하려 한 것도 정조홍국영을 축출한 원인이 될 것이다. 1779년(정조 3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하였고 정조는 홍국영에게 백마와 금전을 선물로 주며 낙향켰다. 홍국영은 낙향한 이후 탄핵 상소가 이어져 강원도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정조 5년) 사망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스스로를 탓하였다.

 

사망

1800년(정조 24년) 음력 6월 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등으로 번졌고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아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煙熏方)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점차 위중해져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결국 음력 6월 28일(양력 8월 1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정조가 승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지나지 않아 대상(大喪)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는 생전에 부친 곁에 묻히고 싶어하였는데, 본래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1년에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영돈녕부사 김조순은 현재의 건릉 자리가 흉지이므로 능을 천장하여 합장해야 한다고 순조에게 건의했고, 건릉은 현재의 자리로 천장되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독살설

정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을 주선한 심환지와 이시수가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독살설을 부추겼다. 남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정황 때문에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파다하였다. 8월 18일 경상도 안동의 남인 출신 거족 여현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그의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

정약용은 여성유배인이 현지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을 개탄한 〈고금도장씨녀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를 적으면서 심환지가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를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남겼다. 그러나 정조 스스로가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주었기때문에 독살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유봉학은 정조가 급서한 것이 아니라 거의 한 달에 가까운 투병이 있었고, 처방에 정조 자신이 관여한 것, 내의원 도제조를 겸고 있어 간병을 지휘한 우의정 이시수는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시파였다는 것을 들어 독살설을 부정하였다.

수은 연기를 쐬는 연훈방을 처방한 의관 심연도 심환지와 성은 같은 심씨이나 일가친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사돈인 시파 김조순 등에 의해 벽파가 일망타진되었던 1806년(순조 6년)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의 시기에도, 이후에도 정조의 독살설에 대해 이와 관련된 문제 제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이화는 이만수가 쓴 정조 행장에서

 

“임금은 이해에 경사를 만나서 옛날 일을 회고하여 속을 썪이다가 자주 편치 않았고 약시중을 받는 일로 피로가 쌓여 종기가 날로 심하였다”

 

는 기록을 들어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한여름에 문을 꼭꼭 닫아 걸고 뜨거운 탕약을 수 없이 마셨으며, 수은 치료까지 받는 중에 거의 20일 동안 미음으로 연명한 것이 결국 더위와 탈진, 영양실조를 불렀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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