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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몰락과 죽음, 죽음에 대한 의문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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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몰락과 죽음, 죽음에 대한 의문점

 

몰락과 죽음 (탄핵과 사형)

1617년 12월 12일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26일 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년 1월 좌참찬이 되고 그 역시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기도한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허균에게는 계속 국문이 열렸고 그때마다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결국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된다.


최후

그해 사헌부사간원은 계속 허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8월 21일 사헌부의 탄핵 상소가 올려진 뒤 바로 파면당했다.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 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겼다. 그는 사위 이사성(李士星)에게 나중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간행하도록 할 것을 부탁했고, 당시 어린 외손자인 이필진에게도 나중에 자신의 문집을 꼭 간행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해 8월 16일 체포되어 의금부압송된 뒤 국문을 받고 8월 24일 한성부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시집간 두 딸은 연좌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하인들의 도움으로 조령 근처로 숨었다가 경상북도 영천울산에 숨어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9세였다.

그에게 능지처참이 집행될 때 무려 3,000번 이상 회질이 가해져 살점이 도려내진 뒤 목이 잘려 매우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체포되자 그와 관련된 인물이 대부분 체포되었고 사위 이사성 역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으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친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극적으로 화를 모면하였다. 그의 조카인 허채, 허보, 허신 등도 의금부로 잡혀가 국문을 당했지만 허균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화를 모면하였다. 그가 처형된 직후에도 계속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의금부포도청에 불려다니며 공초를 당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의 사후 연좌제가 적용되어 강릉에 있는 아버지 허엽의 묘소도 부관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오는 날이면 허균의 선영에는 울부짖음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위령제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허균 사후 그의 후손들은 끊긴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그의 후손들 중 일부는 파가 다른 타 문중(허목 봉례공파)에 양자로 가거나 타인의 후손인 것처럼 변성명을 하고 후손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허균의 살아남은 아들(허굉)의 직계 자손들이 가첩을 통해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여 오다가, 1995년 양천허씨 허추자산공파 세보에 판도좌랑공 11세손(균)파 교산공파로 숨겨긴 혈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인 홍길동전인조 반정 직전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과 서신 등에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홍길동전의 저자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의 문집과 성소부부고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하여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그가 북인대북당원이었던 탓에 복권되지 못하였다. 정조 때와 고종 때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노론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그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한다. 1910년(융희 4년) 조선 멸망 이후 그의 저서 홍길동전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죽음에 대한 의문점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미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시점까지 복권되지 않고,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실제 그 후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성소부부고〉 등 일부만이 남아 20세기까지 전한다.

죽음이 임박해옴을 예감한 허균은 1617년말 맏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자신이 수집한 4000여권의 장서도 맏사위 이사성에게 보낸다.  또한 자기 문집을 정리해 큰사위에게 보낸다. 허균의 문집은 외손자이자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에게 전해졌고 이필진의 묘지명에 허씨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평가

유몽인은 그가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기인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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