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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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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그 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간 정사(政事)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권율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집의 하인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 사실을 알고 꾸짖었으나 하인들은 오히려 감이 자신의 소유라고 우겼다. 어느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 하고 물었다. 하인들이 이항복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인지한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인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장난기 많은 오성대감 이항복은 종종 고지식한 장인인 권율을 놀린 일이 있다고 한다. 청렴결백한 권율은 조복과 의관을 갖춰입으면서도 제대로 된 내의를 입지 못하고 늘 베잠방이 차림이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후 병조판서인 이항복과 도원수 권율이 선조 임금 앞에 대궐조회에 참석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항복은 선조에게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 모두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선조는 쾌히 승락하고 신하들이 모두 관복을 벗었으나 관복 아래 베잠방이 차림인 권율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 마지못해 관복을 벗고 베잠방이 차림을 드러내어 망신을 당한 권율에게 선조는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관계 

이순신과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원균이 수시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이에 원균은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전황을 읽고있던 이순신과는 다르게 수군 단독으로 왜를 격파할 수 있다고 수차례 조정에 장계를 하였고,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심중과 맞아 떨어져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직에 임명된다. 하지만 원균은 부임 이후 이순신의 수군 단독출병 불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고 말을 바꿔 수륙 병진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조선의 군사동원력이 17만명을 모은 임진년보다 크게 떨어진 상황인데도 30만은 동원할 수 있다고 하고, 섬인 가덕도까지 육군이 몰아치면 된다는 현실을 무시한 주장을 했다. 이에 권율은 비밀 장계를 올려 원균의 주장대로 육군을 움직이긴 어려움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 수군에게 원하는 것은 수군의 전면적인 부산포 진격이 아닌, 무력시위를 전개하여 일본이 보급선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원균은 이조차도 하지 못하다가 원균이 부임전과는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자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사실 권율이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유는 표면적인 사유일 뿐이며 권율은 그 정도로 생각없는 위인이 아니였다.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내린 실제 사유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에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의견을 옹호하며 이순신의 주장을 반박하더니 막상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몰아내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원균은 돌변하여 이순신이 주장했던 의견을 그대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권율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관직에 욕심이 난 나머지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갖고 논 원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원균은 전 병력을 끌고 출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충무공유사에서 본 권율1595년 4월 30일

 

 

 

"아침에 원수의 계본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 《충무공유사》 중.

 

기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으며,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또한 당시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욱 심화하는데 일조한 권율은 조선군 총사령관으로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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