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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 원손(단종)을 낳자마자 하루만에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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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 원손(단종)을 낳자마자 하루만에 사망하다.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년 4월 17일 (음력 3월 12일) ~ 1441년 8월 10일 (음력 7월 24일))는 조선 문종의 왕비이다.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화산부원군 권전(花山府院君 權專)과 해령부부인 최씨(海寧府夫人 崔氏)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종의 세자 시절 휘빈 김씨(1429년 7월 18일 폐출)와 순빈 봉씨(1436년 10월 26일 폐출) 이후 세 번째로 맞은 세자빈으로, 1441년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남편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존되었다.

 

생애

원래 왕세자 향(문종)의 후궁인 승휘로 궁에 들어갔으며, 세자의 두 부인인 휘빈 김씨순빈 봉씨가 갖가지 비행으로 왕실을 문란케 한 뒤 폐위되자, 이미 두명의 딸을 낳아 품계가 양원으로 올라가있던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첫째는 어릴 때 죽고, 둘째딸이 경혜공주임.) 세종 실록을 보면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홍 승휘를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어했으나, 이미 딸이 있으며 다른 후궁들보다 품계가 더 높은 권씨를 의리상 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세종의 뜻이 적혀있다. 1441년에 원손(단종)을 낳았으나, 원손을 낳자마자 하루 뒤에 산후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24세였다. 그 후 시호를 현덕빈(顯德嬪)으로 칭하였으나 남편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현덕왕후의 저주와 낭설

야사에서는 세조단종을 죽인 뒤,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했는데, 이로 인해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죽었고, 이에 분노한 세조는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의 소릉(문종과 합장되기 전의 능)을 파헤치고 관은 강에다 버렸으며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서 내쳤고, 중종 때에 다시 왕후로 추존된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덕종(의경세자)이 사망한 것은 1457년 9월 20일(음력 9월 2일), 단종이 사망한 것은 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로 오히려 덕종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현덕왕후의 저주가 덕종을 죽게 했다는 식의 야사의 해석은 옳지 않다.

현덕왕후 폐위의 원인

현덕왕후가 저주한것 은 사후 16년이 지난 세조 3년(1457년) 7월 17일(음력 6월 26일)의 일이다. 시기상으로는 야사의 기록과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현덕왕후의 모친 아지(阿只)와 왕후의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었다. 이에 권자신과 아지는 1456년에 처형되고, 단종1457년 7월 12일(음력 6월 21일)에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한편 이미 사망한 현덕왕후와 그 아버지 권전은 아지와 권자신의 죄로 인해 연좌되었고, 권전은 1456년 8월 7일(음력 7월 7일), 현덕왕후는 1457년 7월 17일(음력 6월 26일)에 각각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1476년(성종 7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에는 그 여파로 현덕왕후의 신위를 불사르게 된다.

복위

성종 때에 와서 서인이 된 현덕왕후를 현덕빈(顯德嬪)으로 복위하였으나 왕비로서의 복위는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올라온 이후 합의를 거쳐 1513년(중종 8년) 4월 17일(음력 3월 12일) 때 최종 결정되었으며, 야사에서 언급한 숙종 때는 현덕왕후가 아닌 권전1699년(숙종 25년) 8월 10일(음력 7월 15일)에 명예 회복을 하게 된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현릉(顯陵)으로, 남편 문종과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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