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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돈, 무오사화의 원인 제공자, 유자광에게 조의제문 실린 사실을 알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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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돈, 무오사화의 원인 제공자, 유자광에게 조의제문 실린 사실을 알려주다.

 

이극돈(李克墩, 1435년1503년 2월 27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 학자, 외교관이다.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의 동생이다. 무오사화의 원인 제공자로 유자광에 의해 지목되어 사림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관에 녹선되고, 광원군(廣原君)에 봉군되었다. 자(字)는 사고(士高)이고 호는 사봉(四峯)이며 시호는 익평(翼平), 본관광주(廣州)이다. 그의 부친 이인손과 형 이극배, 동생이극균 3부자가 정승을 지내고 나머지 형제들도 판서를 지냄으로써 형제가 모두 작위를 받고 봉군되어 형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동생 이극균과 함께 봉군되어 5군으로 불렸으며, 종형제인 이극규, 이극기, 이극견 등을 포함하여 8극으로 불리기도 하며, 광주 이씨는 당대 제일의 가문이 되었다.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 당상관을 역임하였다. 1498년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意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을 기록한 것을 발견하고는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했으나 효과가 없자,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유자광(柳子光)에게 이를 알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 이는 이극돈이 죽은 이후 중종반정 이듬해 삼사의 탄핵을 받은 유자광에게 무오년의 일에 대해 문초하자 유자광이 처음에는 허침에게서 들었다고 하여 그럴리없다고 추국하자 이극돈이 알려줬다고 토설한 진술로인해 사림으로부터 유자광과 함께 이극돈이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자 지목되었다. 무오사화때 유자광김종직의 저서들도 구하여 조의제문 사본을 의금부형조의 형관들에게 제출하고, 원본에 해석과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전달하면서 사태가 확대되었으며, 연산군은 김종직세조의 부름을 받아 세조의 녹을 받았으면서 주인을 배신했다며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다. 그러나 어세겸·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이극돈 또한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사화가 있은 뒤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하여졌다.

 

죽음

1469년(예종 1)에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 완간하였으며, 성종때에도 왕명을 받들어 1483년(성종 14) 강목신증(綱目新增), 1485년(성종 16)에 성종의 서거정(徐居正)·정효항(鄭孝恒)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 을 편찬, 발간하였다. 1501년(연산군 7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 9년) 1월 병조의 업무가 중함을 들어 스스로 병조판서에서 사퇴하고, 그해 2월 2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향년 68세였다. 죽은 뒤 익평(翼平)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뒤에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으나 중종6년 이세정의 상소에의해 환급되었다.

 

사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 대원근린공원 뒤 능선에 안장되어있다.

1511년(중종 6년) 6월 아들 병조 참의 이세정(李世貞)이 그를 신구, 변호하며 억울함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중종이 특명으로 그의 직첩을 되돌려주었다. 바로 홍문관 부제학 이세인(李世仁)이 작첩 환급의 불가함을 상소했으나 왕이 거절하였고, 6월 16일 예문관 봉교(奉敎) 유중익(兪仲翼)은 그가 유자광을 사주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며 환급의 반대를 상소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양사에서 작첩 환급의 불가함을 계속 상소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으며 추후 다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평가

세조, 성종 대에 유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관으로 중용되었을 뿐 아니라 국방, 외교, 내치에 골고루 업적을 남긴 관료였다. 글을 잘 지었으며, 전례(典禮)에 밝고 경학과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실록에는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고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하여,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서 한때의 추앙한 바가 되었지만, 성격이 너무 까다로워 털끝만한 일도 파고들었다.'고 평하였다.

이극돈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정국을 이어갔던 때였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홍문관,사헌부,사간원으로 대표되는 삼사의 역할과 위상이 고조되어 의정부,육조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국정운영의 한축으로 떠올랐던 시기였으며, 조선 건국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과전법이 붕괴되어 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렇듯 혼란한 정국속에서 훈구세력을 대표한다고 알려진 인물이 다름아닌 이극돈이었다. 이극돈이 성종 초기에 사헌부 대사헌 신분으로 시무12조라 일컫는 상소문을 올려 왕으로 하여금 국정전반에 걸친 폭넓은 개혁을 주창하였으며 차서를 구애하지말고 발탁하여 등용 할 것 등을 요구한것은 당시대의 사대부가에서는 상상하기힘든 진보적인 주의주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왕으로 하여금 국가 원로등이 총 동원되어 사안별로 검토케 했으며 국정운영에 적극반영되게한 실천적 리더십으로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이극돈은 조선 초기 훈구와 사림세력의 갈등 구조 속에서 훈구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데, 그가 죽은 이후에는 사림세력들이 집권하여 정권을 유지해 갔기에,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무오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도리어 국왕에게 미리 실록의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점은 역사 평가 작업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김종직조의제문을 지은 것을 최초로 발설한 인물인 유자광에게 성종실록조의제문이 실린것을 알려준 인물로 유자광에의해 지목되어, 연산군 4년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자로 알려져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중종 때인 1511년 아들 이세정의 상소에 의해 복권되었으나, 조광조 등 사림의 진출과 1565년(명종 20년) 훈구파가 정계에서 몰락하고 그의 후손인 이이첨인조반정에 의해 실각하면서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에 대한 동정 여론과 복권 논의가 나타난 것은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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