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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차출 방법과 대상,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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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차출 방법과 대상, 규모

 

일본군 위안부 ( 慰安婦 (いあんふ) 이안 Comfort Women) 또는 일본군 성노예(한국 한자日本軍性奴隸, 영어: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일본 측 주장 종군위안부( 從軍慰安婦 (じゅうぐんいあんふ) 주군이안후)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위안부가 되는 방법으로는 징용 또는 납치, 매매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였다.

위안부의 구성원으로는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인 등이 포함된다. 그 밖에 필리핀태국, 베트남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징발되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살고 있던 얀 할머니(얀 루프 오헤른)는 KBS 다큐멘터리 《K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일본군에게 잡혀왔다는 증언을 한 바가 있다. 얀 할머니의 고백 이후 엘른 판 더 플루흐머니도 일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1991년 8월 14일에는 김학순이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2004년 11월 29일에는 심미자 등이 일본 대법원에서 일본군위안부로 인정되었다.

1994년 8월 31일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 富市) 내각총리대신(총리)이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담화를 낸 바 있다. 또한 1996년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역시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아울러 이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나 양국간 각종 조약(한일기본조약 등)따위로 법적으로 해결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일본 측은 대한민국 정부 또한 미군을 위해 위안부와 비슷한 것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진상 규명 및 적절한 배상, 책임자 처벌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199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항의하는 수요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차출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가난 & 가족의 빚 청산

 

 

가난한 집안 환경 또는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하는 케이스도 존재하였다. 1942년 5월 초순 일본이 새로 정복한 동남아시아에서의 위안 서비스를 위해 한인 위안부를 모집하려고 일본인 주선인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 주선인들의 조건은 '많은 돈, 가족의 부채를 없이 하는 기회, 쉬운 일' 등이었다. 이 조건에 현혹되어 많은 여성들은 해외 모집에 응했고 몇백원의 착수금을 받았다.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한 돈을 미리 받고, 상이군인 간호 등의 감언에 속아서 버마 전선에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위안부가 아니라 채무에 의해 성노예의 처지에 빠졌다. 일부 여성들은 '농촌지역의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소녀들'이었다.

일부 여성은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위안부에 자원하였다. 그리고 위안부가 되기 전에 먼저 '사전에 돈을 가불받아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도 했다. 그들이 사전에 받은 가족의 빚을 위한 착수금의 다과(많고 적음)에 따라서 6개월 내지 1년 동안 '업자 주인'을 위해 일하게끔 되었다.

 

유괴와 납치

일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1992년 우연히 발견한 위안부 관련 서류에는 중국 북부를 점령한 구 일본군의 참모가 위안소의 설치를 명령하는 내용 이 담겨 있었다. 1956년에 중국에서 행해진 일본인 전범 재판으로 스즈키 히라쿠 중장의 자필진술서에는 일부 조선인과 중국인 여성을 유괴해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진술도 적혀 있다.

교토시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전쟁의 진실을 말하는 모임’에서 1942년 싱가포르에서 육군 헌병대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나가세 다카시(永瀨隆·89) 씨는 “조선 위안부들은 모두 군용선에 실려 왔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당시 상부 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온 여성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러 와 있던 그에게 그 여성들은 “싱가포르의 일본군 식당에서 일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위안부를 할 것을 강요했다”라고 하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증언했다.

 

현지 여성 조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던 일본인(아오치 와시오, 1967년 야스쿠니에 합사)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소의 재판에서 "아오치는 1943년 6월 2일 군 간부로부터 매춘업소를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차 지시를 받은 후 이를 수용했다"라고 군이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음을 인정했다.

일본 국회도서관 보관되어 있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문서 중에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의 일본 육군중위에 대한 심문조서 에는 일부 현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독신여성 조달

일본군에서는 독신여성들을 위안부로 조달하기도 했다. 속임수로도 그 수요를 채울 수 없게 되자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만들어 만 12~40세의 독신녀 전체를 정신대의 대상자로 규정하였다. 정신 근로대 영장을 받고 차출된 여자 정신대에서도 일본군 위안부가 충당되었다.1980~1990년대 보도에서 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용어를 구분하지 않고 보도되었다. 일제 강점기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을 말한다.

 

근로정신대 탈영자

근로정신대 탈영자도 존재하였다. 위안부 외에도 정신대 등 징용으로 간 여성들 중의 일부가 위안부로 편입되기도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2년 면담한 위안부 출신 한인 여성들 중에는 근로정신대 탈영자도 있었다고 한다. '강제로 납치되었거나 근로정신대로 소집되어 갔다가 굶주림을 못 이겨 도망했으나 결국 잡혀서 위안부가 된 경우였다' 한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목적이 다르다고 한다. 위안부였던 심미자에 의하면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존재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며 용어 사용을 분명히 해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5년 지만원, 독립신문 등과의 인터뷰에서 심미자의 설명에 따르면 '정신대'는 여성 근로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위안부'는 일본군에게 '성'을 제공한(빼앗긴) 여성들을 말하는 것이다 라며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른 존재라 하였다.

 

인원

1942년 5월부터 8월 20일까지 한국인 위안부는 약 800명이 모집되었다. 이들은 1942년 8월 20일 일본인 업자 주인들과 함께 미얀마의 랑군으로 상륙했다. 일본군 위안부 총인원은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오 대학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계산법 에 의하면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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