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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3일 천하', 개화파가 민중에 뿌리내리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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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3일 천하', 개화파가 민중에 뿌리내리지 못하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1884 124(고종 21음력 1017)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개화당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쿠데타)이다. 진압 후, 갑신난,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이라 불렀다.

124 저녁의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 내외와 왕비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6 오후,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개화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 중 현재 전하는 기록은 14개 조항이나, 일설에는 80개 조항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24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명성황후창덕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창덕궁의 의지를 얻지 못한 점, 일본의 지원에 의존해 실패했다는 비판이 상존하고 있다. 그해 12조선 조정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전권대사로 파견,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개입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한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갑신의거, 갑신사태, 갑신봉기 등으로 부른다. 그밖에 '3일 천하', '3일 혁명' 등으로도 부른다.

 

1874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1876 일본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1875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때 조선군의 선제 발포가 문제가 되어 1876 2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후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77 흥선대원군의 쇄국을 반대하고 강화도 조약을 지지하였던 박규수가 별세, 1882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1884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그해 7부터 계획을 세워 그해 124 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 명성황후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곳을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126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현재 전하는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한다,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한다, 조정 대신들은 직접 회의를 개최하고 안건을 결정한다, 순사를 설치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그 중 일부인 14개 조항의 내용만이 현재 전한다.

  1.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실력과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3.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들을 근절하고 궁민(窮民)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4.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5. 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리(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6. 각 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폐지할 것
  7. 규장각을 폐지할 것.
  8.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9.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10.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묻고, 무고한 죄인은 석방시킬 것.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왕세자로 임명할 것.
  12.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중앙 재무관청은 금지, 혁파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政令)을 의정, 시행할 것.
  14. 의정부, 6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실패의 원인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민중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턱없이 부족한 준비기간과 자금력의 부족 역시 이들의 거사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지향할 수 있었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점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

이때 처형된 이가 약 6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윤효정'개화당의 박영효,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사대당의 한반도 천하기로 변화되면서 개화 소장파 570명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유길준은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한다. 한편 고종의 소환령을 듣고 귀국하던 유길준은 귀국 직전 일본에 들러 그는 김옥균, 박영효, 박중양을 만났는데 한성부에 돌아오자 마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귀국 직후 유길준박영효김옥균의 은신처를 자백하라며 고문을 당했지만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그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등과 친하다는 죄목이었다. 감옥살이는 면하였지만 그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었다.

유길준은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포도대장이 왕명을 사칭, 집으로 불러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잠을 청했는데, 이때 조강하, 이교익이 백방으로 그를 비호하고 나서 죽음만은 면하고 백록동에 감금되었다.

 

의의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적절한 시기에 나서서 중세 봉건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부패의 요인을 제거,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개화파는 125 발표한 새 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고대 이후 중국에 반 속국화된 사대교린의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화 하려 했다. 정치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왕실 중심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하되 왕실의 협력을 구하려 하였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행위 근절을 목표로 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고려, 조선 속방화 정책에 대한 과감한 저항의 형태로서 일종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본다.

또한 정강의 하나에서도 발표하였듯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분제도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과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데에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을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이는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하되, 세제 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당시 반() 봉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우호 세력인 민중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져왔다.

 

평가와 비판

개혁적인 성향의 관료와 지식인, 청년층의 주도로 일어난 계몽성 혁명이라는 긍정과 민중의 지지기반이 취약한 점과 준비 미숙으로 실패했다는 비판이 양립하고 있다. 한편 '개화파의 사상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그 지향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는 평가도 있다.

박은식은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에서 갑신정변을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며,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한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규정하였다.

학자들은 갑신정변이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이며,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을 최대의 단점으로 비판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다. 급진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 하나, 외세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 수 있다. 개화파는 반청 의식만 강했을 뿐,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개화는 곧 일본화라고 생각하여 일본을 모델로 삼는 데 그친 것이다.'고 지적했다.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그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정변 실패에 대해 민중들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195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에서는 갑신정변을 봉건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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