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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헌애왕후, 김치양과의 사통사건으로 왕실의 권위에 타격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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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헌애왕후, 김치양과의 사통사건으로 왕실의 권위에 타격을 주다.

 

헌애왕후(獻哀王后, 964 ~ 1029 120 (음력 13)고려의 왕족, 왕비로 고려의 5대 왕 경종의 세 번째 왕비이다. 7대 왕 목종의 모후로, 태조의 아들인 대종과 선의왕후에서 출생하였다. 시호로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 하며 흔히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도 한다.

경종 사후 궐밖에 나가 살다가 외가 쪽 친척인 김치양과 자주 만나던 중 사통하여 아들을 얻었고, 목종 즉위 후 섭정을 하였으나 자신의 친조카 대량원군을 암살하려 하였다. 경종의 제1비인 헌숙왕후와는 고종 사촌간이었고, 4헌정왕후는 그의 친동생이었다.

 

생애 초반

헌애왕후는 964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선의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경종(景宗)의 제3비이자 목종(穆宗)의 어머니이며, 성종(成宗)의 누이동생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언니이다. 오빠인 성종과는 달리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부모의 성인 왕씨(王氏)나 유씨(柳氏)가 아니라, 왕실의 풍습규율에 따라 할머니인 고려 태조 제4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의 성을 따른다. 경종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왕비 책봉과 태후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경종(景宗)의 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회임을 하였고, 이때 경종은 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종에게는 후사가 없어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회임과 동시에 헌애왕후는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드디어 헌애왕후가 아들 목종을 낳았고 경종은 기뻐한다.

981 남편인 경종이 죽자 당시 2살에 불과하던 헌애왕후의 아들 왕송(王訟) 대신 그녀의 오빠인 황주원군 왕치(王治, 성종)가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출궁, 궁 밖에 머물렀다. 유교를 국교로 하려던 성종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에게도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였다.

아들이 없던 성종은 자신의 외조카이자 헌애왕후의 아들인 왕송을 개령군에 봉하고 궁궐에 데려다가 자신의 친아들처럼 양육하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왕송(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고,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김치양과의 스캔들

한편 그녀는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치양의 본관은 동주(洞州)이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

김치양과 자주 만나던 헌애왕후는 그와 통정하게 되었는데, 성종은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만남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헌애왕후는 자신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김치양을 비밀리에 자주 만났고,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키다가 왕후의 오빠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는 헌정왕후의 사통 사건과 함께 왕실의 권위에 타격을 주었다.

 

태후로서의 섭정

그러나 후에 성종 사후 천추태후는 섭정을 시작하자,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7품인 합문사인으로 삼는다. 이후 그녀의 후원하에 김치양의 벼슬을 거듭 승진시켜 상서우복야 겸 삼사사(당시 재정권과 인사권을 동시에 담당하던 직책)에 임명시키고 막대한 권력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천추태후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김치양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1003(혹은 그 이전)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정을 통하던 끝에 둘 사이에서 아이가 출생하자, 후일 이 아들로 하여금 병이 든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를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대량원군 왕순(大良院君 王詢, 후일 현종)을 죽이고자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대량원군에 대한 박해

아들이 18세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 섭정을 하며 김치양도 불러들여 1003(목종 6)에는 아들을 낳게 된다. 목종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 아들로 하여금 후사가 없던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략을 꾸민다. 그것은 왕씨 왕조가 김씨 왕조로 바뀌는 중대사안이었다.

천추태후가 볼 때 자신들의 구상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조카, 즉 동생과 왕욱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태어났던 그 아이였다. 이미 나이도 10대 중반을 넘고 있었다. 권력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쥐고 있었지만 대의명분은 그 아이에게 있었다. 대량원군 순은 자신의 이종 조카가 되지만, 아버지 쪽으로는 사촌 동생이었다.

비정상적인 출생이긴 하지만 아버지 왕욱은 분명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다. 결국 그 아이 왕순(王詢)은 성종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극진한 보호를 받았지만 천추태후의 천하가 열리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왕순의 머리를 깎아 강제로 출가시켰던 천추태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신혈사의 승려들이 왕순을 피신시켜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한 번은 살해에 성공하였지만 태후가 보낸 자객이 죽인 이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동자승이었다.

 

생애 후반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목숨을 잃었고, 천추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향하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1009년 천추태후는 고려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였다.

한편, 강조 등은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바로 고려 현종이다. 천추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났고 황주에서 살다가, 현종 20년 정월에 왕궁으로 돌아와 66세를 일기로 황주 명복궁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숭덕궁(崇德宮)에서 사망했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묘는 유릉(幽陵)이다.

 

평가

고려사(高麗史)등의 사서(史書)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私通)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광종대목왕후의 딸이자, 문원대왕의 아들 천추전군에게 시집간 천추전부인천추태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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