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평가와 한계와 비판, 부청멸양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의화단의 난이라고도 하며 1900년, 즉 경자년(庚子年)에 일어난 교난이라는 의미로 경자교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의화단을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라는 의미의 ‘권비(拳匪)’나 ‘단비(團匪)’로 지칭하였는데, 따라서 의화단운동을 ‘의화단의 난,’ ‘권비의 난,’ ‘단비의 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산둥 지역에서는 일찍이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됐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했다.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 성의 북부 지역에서 1898년 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해 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했다. 1899년 12월에 새로 부임한 산둥 순무(巡撫) 위안스카이는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했는데 이것이 의화단 세력이 허베이 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면서 의화단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의화단은 철도, 교회, 전선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기도 했다.
1900년 1월 서태후가 황제인 광서제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열강이 서태후의 의도를 간파하고 공동으로 압력을 가해 그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 때문에 청나라 정부의 수구파는 의화단의 배외 운동을 고무해서 열강에 압력을 가하고자 했다. 1900년 6월에 의화단이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 포고했다. 이에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8개국이 파병해서 베이징을 비롯해 양쯔 강 이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열강은 중국을 분할하지 않는 대신 보존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청나라 왕조와의 협상을 거쳐 1901년 9월 7일에 강화 조약인 신축 조약(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내용은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열강의 중국 내 군대 주둔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평가
의화단 운동은 가난한 농민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었으나 반봉건적이거나 혁명적인 성격은 없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의의는 상당히 컸다. 첫째, 의화단 운동의 결과 중국의 민족주의가 탄생하였다. 이들이 도처에 붙인 게첩(揭帖)에는 '중국이 당면한 문제'를 지적하고 반제국주의적인 내용이 충만히 있었으며, 행동으로 투쟁하자는 것으로 가득찼다. 둘째, 제국주의에 대하여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의 대립으로 중국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무기는 열악하였으나 의화단의 저항은 8개국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독일의 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가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중국을 넘겨준다는 것은 '절대 실현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중국인들은 '무한한 생기를 갖고 있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열강들에게 중국을 넘겨줄 수 없다고 인식시켰다.
폭력과 살상 행위
의화단의 행위는 무고한 외국인들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광서제(光緒帝), 이홍장(李鴻章), 혁광(奕劻), 중앙정부(京官)의 대신(大臣) 을 포함하는 (외국인 및 기독교인의 수를 훨씬 초과하는)수많은 무고한 중국인들에게도 피해를 주어 서양인에서부터 기독교인,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살인(도살), 강간, 약탈하였다.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이 처사는,전통 중국의 도덕관념과도 어긋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야만잔혹행위(野蠻殘暴)였다.타이완 및 수많은 해외 중국인들이 의화단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미신(迷信) 및 폭력(暴力)의 상징으로 보아,사람을 모욕하는 단어로 의화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역사학자 당덕강(唐德剛)은 의화단 운동을 문화대혁명의 홍위병(紅衛兵)에 비유하기도 한다.
2000년 바티칸의 "봉성"(중국어 간체: 封圣, 정체: 封聖, ) 사건에서는, 대다수 “봉성”의 성도는 의화단 운동에서의 “순교자”이며,중국의 관점에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과는 다른 입장에서,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티칸의 교황은 봉성일(封聖日)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경일로 정한 데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봉성(封聖)의 결정을 바꿀 뜻은 없다고 밝혔다.
8국연합군(중국어 간체: 八国联军)의 작전 수요에 대항하여,교통과 통신을 단절한 것에 대해서는 청 정부도 청군에게 철로(중국어 간체: 铁路)의 훼손을 명령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족의식 각성
중화인민공화국의 당국의 관점에서는 의화단 운동은 근대의 의미있는 표지로서 중국의 민족의식을 각성하고 중국의 근대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본다. 949년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서에는 '의화단은 제국주의 침략의 실패를 증명하고, 정확한 지도 사상이 없이는 인민 혁명의 승리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중국학계의 일반적 인식은, 중화민국(民國)의 5·4 운동(五四運動), 5·30 사건(五三十事件)과 함께,근대 이래 중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한 3대 군중성(群衆性) 민족주의 운동이라 한다. 그 중 5·4 운동은 주로 제국주의의 정치 주권 침략에 반대 면 의화단 운동 및 5·30 사건은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 및 문화 침략에 반대 운동으로서, 지속된 시간이 더 길며 끼친 영향은 더욱 심원(深遠)하다고 본다。
종교 전쟁
의화단 운동에서, 중국 한교(中國漢教)및 외래 기독교 의 모순이 충돌한 측면에서, 「한교를 보호하고, 양교에 반대(중국어: 保漢教、反洋教)」하는 것을 의화단 운동의 중요 목적의 하나로 본다. 철학가 당군의(唐君毅)는 의화단 운동을 '중국 민간 도교와 서방 기독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 생각했다.
권력 투쟁
역사학가 당덕강(唐德剛)은 의화단 운동의 또 다른 원인은 청 정부의 권력투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술정변(戊戌政變) 후, 서태후(慈禧太后)와 광서(光緒) 등의 황제 자리를 두고 서방 열강의 반대를 접하게 되어, 한이 되었다。 여러 차례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파들은 광서제(光緒帝)를 모욕하였다.
청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의화단을 이용해 승진 및 재물 취득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다.
한계와 비판
의화단 운동은 청나라 조정의 보수파, 보수적인 관료와 신사들, 무지몽매하고 미신을 믿는 민중의 힘이 결합해 전개된 것이었다. 이 운동은 열강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완전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 내재적으로는 애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으나 자국민 기독교도들 학살 자행과 수 많은 해악을 끼친 점과 외국 열강으로부터 개입을 허용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의화단 운동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나 의화단의 조직이 미약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도 보잘 것 없는 것인데 비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힘은 너무 컸기 때문에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의화단이 외쳤던 멸양 구호는 반제국주의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대립을 이해하거나 이용하지 못하여서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역의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였기 때문에 의화단의 구성원은 조직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고 명확한 정치의식도 없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된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의화단 운동은 낙후된 종교와 미신의 조직과 형식을 갖고 이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혁명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부청'이란 사상적 속박 안에서의 운동이어서 오히려 청 정부에게 이용되고 매도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