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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노부나가의 성격, 잔혹성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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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노부나가의 성격, 잔혹성에 대한 평가 

 

오다 노부나가(일본어: 織田 信長 (おだ のぶなが),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는

일본전국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연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 일본의 삼영걸로 불린다. 오와리 쿠니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으로, 아버지 대부터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정이대장군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자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면서 전국 시대의 일본을 평정해, 하극상이 계속되던 전국 시대 끝에 최초의 천하인이 됐다.

그러나 1582년(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중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을 막지못해 혼노지에서 자살했다. 이미 형식상으로나마 가권은 장남 오다 노부타다에게 넘긴 상태였으나 장남마저 교토의 니죠 성에서 살해돼 후계자리가 또다른 중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갔고, 이런 일본 통일의 기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생애 내내 당시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무력으로 무너뜨렸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정책적으로도 낙시락좌(일본어: 楽市楽座 (らくいち・らくざ); 일종의 상업진흥, 자유무역정책), 검지(일본어: 検地 (けんち); 토지조사), 서양에의 문호 개방 등 봉건적 일본에서 누구도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결단으로 문화 경제적 발전을 이뤄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 불교신도 세력의 권위를 부정했고,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고 자신도 잠시 관심을 가졌으나 결국 자신을 신격화 하는 데로 나아갔다.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를 "신이나 부처,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교도이다. 스스로 서찰에서 제육천마왕이라고 칭했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성격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란 시구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전해질 만큼 과격하고 급한 데가 있는 성격이었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아자이 히사마사, 나가마사 부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3인의 두개골에 금칠하여 연회 때 그 일을 널리 알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잔 대신으로 사용되어 가신들이 그 잔에 든 술을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후세 소설가의 각색이고, 실제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골에 하쿠다미 를 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나타낸 것일 뿐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사자에 대한 모욕은 아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인물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크며, 마른 체격으로 수염이 적다. 목소리는 꽤 큰 편이며 항상 무예를 좋아해 천하고 상스럽다. 정의롭고 자비를 베푸는 행동을 즐겨 한다. 오만하고 명예를 존중한다. 결단력이 뛰어나고 전술에 치밀함이 있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을 대부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신 이외의 다이묘 대부분을 경멸하여 마치 자신의 부하나 다름없이 낮춰 말한다. 좋은 이해력과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부처 등 우상을 경시하여 점은 일체 믿지 않는다. 명목상은 자신의 종교가 법화종 불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물주, 영혼 불멸, 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업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공명에 최선을 다한다. 사람과 대화할 때 돌려 말하거나 둘러대는 것을 싫어한다.

 

세간의 평판을 중시하고, 항상 올바른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부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은 교토 귀족 등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노부나가의 잔혹성에 대한 평가

노부나가가 행한 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옛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당시 단행되었던 정책에 관해서 비난이 많다. 이 때문에 광기의 혁명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단, 이와 같은 비난에 관해서는 노부나가 사후에 오다 가를 계승한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정보조작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경계하였고, 냉대 하였지만, 그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오다 가문의 피가 섞여 있었다.(히데요리의 어머니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의 장녀로써 히데요시에게 시집갔고, 이에미쓰의 어머니는 오이치의 삼녀로써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부터 엔랴쿠지(히에이 산)를 불태운 등 불교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고 잔인하게 탄압한 일 때문에 노부나가를 악인으로 모는 견해가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 세력은 반란을 선동하는 등 하나의 정치/무장 세력이었고 여러 사람에게 부정부패/불교 계율의 위배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타락한 세속적 세력이었고, 종교 세력이 속세의 권력과 하나가 되어 종교 본연의 의의를 망각한 일과 승려들의 부패 등을 감안해 볼 때 노부나가의 불교 탄압을 정교분리의 시초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중기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그 수법이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승려의 폐단을 없앴으니, 이 또한 천하에 큰 공을 세운 일의 하나라고 봐야한다.”라고 평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자보즈(茶坊主) 의 일처리에 무언가 문제가 있어 이에 노부나가가 격노하였고, 자보즈는 자신에 미칠 화를 두려워하여 선반에 숨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선반째로 칼을 내려쳐 자보즈를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자보즈를 벨 때 베는 맛이 좋아 사용된 칼에는 헤시키리(圧し切り) 하세베(長谷部)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겐키 원년(1570년) 음력 5월 6일 스기타니 젠주보(杉谷善住坊)라는 이가 출신 조총의 명수가 노부나가를 암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덴쇼 원년(1573년) 젠주보를 잡혀 왔다. 노부나가는 젠주보를 머리만 나오게 흙에 묻어 생매장 하고 무딘 대나무 으로 그의 목을 썰어 고통 속에 서서히 죽였다.

덴쇼 3년(1575년) 음력 11월 미노 이와무라 성을 함락한 후, 항복조건으로 내건 장수들의 구명을 무시한 채 적장 아키야마 노부토모오쓰야노 가타를 비롯 5 명을 나가라 강변에서 거꾸로 매달아 찔러 죽였다. 오쓰야노가타는 이와무라 성을 적에게 바치고 함락했다고는 하나, 오다 노부나가의 친 숙모에 해당했다.

덴쇼 6년(1578년) 기나이의 고야 산의 문도(고야히지리) 1383 명을 포박해 살해하였다. 이는 고야 산의 문도들이 밀정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노부나가의 잔혹한 성격 / 반 불교적 성향을 나타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덴쇼 6년(1578년) 음력 12월 13일 아마가사키 부근에서 아라키 무라시게 일족 부녀자 122 명을 십자가에 매단 후 찔러 죽였다. 더욱이 남자 124 명, 여자 388 명을 4 동의 가옥에 몰아 넣은 후, 불을 질러 죽였다.

덴쇼 10년(1582년) 음력 4월 10일 노부나가는 비와 호지쿠부 섬(竹生島)의 참배를 위해 아즈치 성을 출발하였다. 아즈치 성과 지쿠부 섬 사이는 좀 멀었기 때문에 당일로는 돌아가기 어려운 거리였다. 이 때문에 시녀들은 노부나가가 자리를 비운 것을 기화로 직무를 이탈해 구와노미데라(桑実寺)에 참배가거나, 마을에서 장을 보거나 하여 아즈치 성을 비웠다. 그러나 일정과 달리 노부나가는 그날 돌아왔으며, 시녀의 외출을 안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시녀들을 참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때, 시녀들의 구명을 탄원한 구와노미데라의 주지 역시도 살해하였다. 단, 구와노미데라에는 이때 살해되었다는 주지의 기록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이후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문헌의 기술은 세이바이(成敗)되었다고 적혀 있으나 이는 죄를 물어 주살한다는 의미 외에도 단순히 엄하게 벌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참살당했다는 일반의 이해는 오해로 생각된다.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에 대해 행한 행동은 대부분은 당시 시대상황상 학살이라기보다 오히려 보통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센고쿠 시대를 조기에 끝을 맺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노부나가가 행한 처형 방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 여러 다이묘도 했었다.

덴쇼 5년(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비젠, 미마사카, 하리마 국경 부근에서 여자, 어린아이 200 명 이상을 꼬챙이에 꽂아 죽이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지금도 이 부근은 지옥골짜기라고 불리고 있다. 다케다 신겐우에스기 겐신 등도 인신매매를 하는 등, 노부나가가 한 행동 역시 특별히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당시 상황과 도덕 기준을 생각해 그의 행동을 평가해야 한다.

 

초상화

아이치 현 도요타 시조코지(長興寺)에 노부나가를 그린 그림이 있으며, 그 외에도 유럽의 화가가 실사한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진만이 전해진다. 현존하는 사진을 보면 진한 눈썹에 날카로운 큰 눈, 높은 코, 다물어진 입, 긴 얼굴 윤곽과 수염 등이 특징이다. 단, 이 초상화에 관해서는 사료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아, 메이지 시대 행해진 현창사업 때 작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노부나가의 청년 무렵에는 여자로 잘못 볼 정도로 미소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키는 약 170 cm 정도에 500 m 앞에서도 들을 수 있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관계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들과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실제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다.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쓰리를 즐겼던 것 같다.

상경 이후 조정 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구게와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마에히사(近衛前久)와는 애당초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였다고 한다.

당시 다른 센고쿠 무장과 같이 남색(슈도衆道)을 즐겼다. 고쇼마에다 도시이에, 호리 히데마사, 모리 란마루 등과 관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고 대신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서양문물의 관심

서양문물에 관심이 깊어, 교토에서 열린 관병식벨벳으로된 외투에 서양 모자를 쓰고 참가하였다. 만년에 전장에 나갈 때면 서양식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 알레산드로 발리그니아누(Alessandro Valignano)의 노예였던 흑인에 흥미를 나타냈고, 그를 양도 받아 야스케(彌介)라고 부르며 측근으로 삼았다.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하며, 예수회 선도사에게 지동설과 둥근 지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하다"라고 흥미를 나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호기심이 강해 조총이 일반적이지 않을 무렵부터 화승총(火縄銃)을 주 전력으로 사용하였다. 기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상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 것 같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 성을 그린 병풍도를 선물했고 노부나가가 죽은 후인 1585년에 도착했다고 한다. 현재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

 

문화에서의 관심

바둑, 고와카마이를 좋아하고, 사루가쿠(猿楽)를 싫어하였다. 고와카마이의 '아쓰모리' 중

 

인간세상 오십년 하천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이란 대목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의 가장 아래로, 이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50년이라고 한다. 노부나가는 16 세기의 인물이므로 "인간"을 "인간 세상"의 의미로 사용했으므로, 인간세상의 50년이라고 해봐야 하천에서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세의 부질없음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스모(相撲)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열었다. 또, 스모 대회는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어,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名人)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坪内)라는 이름을 가진 미요시 가문의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 노부나가는 쓰보우치에게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노부나가가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쓰보우치를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1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나온 2 번째 요리의 맛을 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수긍하고, 고용하였다. 그 후, 쓰보우치는 “애초에 2번째 요리를 내왔으면 좋았잖아.”라는 물음에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 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 요리였을 뿐이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 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후일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은 나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하는 것이 가신 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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