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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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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4월 2일 ~ 1559년 6월 14일)은 조선 중기왕자이며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다. 본관전주(全州), 는 이초(李岹), 는 경앙(景仰), 아명(兒名)은 이환수(李歡壽)이다.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의 사친(私親)으로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당시 적서를 가리던 그 시대에, 중종 임금의 서자였고, 선조는 서얼 콤플렉스와 방계승통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순조왕족 아들의 수가 귀해지자 선조의 왕자군(王子君)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적용시켰다가 결국 뒤이어 덕흥대원군의 직계 후손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였다.

 

생애

1530년 4월 2일(음력 3월 5일) 궁궐에서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서9남이자, (贈) 의정부 좌의정추증안탄대의 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친형제로는 영양군 이거, 정신옹주가 있다. 처음 이름은 환수(歡壽)였다가 뒤에 초로 개명하였다.

1538년(중종 33년) 덕흥군(德興君)으로 책봉되었다.

1542년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손자로 지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인 하동 정씨와 가례를 올리고 출궁하였다. 그의 집이었던 도정궁은 처음에 한성부 사직동 근처에 있었다.

1552년 4월 23일 당대의 고관 몇 명과 사대부들과 시비가 붙고, 기생들과도 어울려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마되었다. 1554년 3월에는 덕흥군의 집 노비들과 그의 장인인 정세호의 집 노비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으나 역시 명종이 무마시켰다.

1559년(명종 14) 6월 14일(음력 5월 9일)에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그 해 9월 17일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언덕에 예장하였다.

 

사후

생전 명종에 의하면 그는 무식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1567년(명종 13년)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鈞)이 후사없이 죽은 명종의 뒤를 이어 조선 14대 왕인 선조로 즉위했다. 중종 이후 외척의 발호에 부정적이었던 신하들은 명종의 하성군 낙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바로 동의하였다.

선조는 즉위 후 번번히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삼사는 선조가 덕흥군의 아들이 아닌 명종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아 즉위했음을 이유로 들어 덕흥군의 추존을 반대하였다. 1569년(선조 2년) 11월 1일선조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고하려면 황백부모(皇伯父母)를 칭하기로 하였다.

그의 아들이며 선조의 형 하원군 정에게는 작위 정1품에 가하고, 4대에게 작위를 내리고 덕흥대원군묘를 봉사하게 하였다. 이후 잠저(도정궁) 후원에 가묘(家廟, 덕흥궁)를 세워 신위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것으로 정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수락산에 있다.

 

저서

유묵(遺墨) : 7언절구 초서 한시, 해동서첩에 실려 있음.

 

덕흥대원군 한시

반세우수이작옹(半世憂愁已作翁) / 반평생 우수(憂愁) 속에 이미 반늙은이 되었는데

성은여해읍무궁(聖恩如海泣無窮) / 바다 같은 성은(聖恩)이 눈물로도 끝이 없네.

인언가여인정근(人言可與人情近) / 사람들 말과 같이 인정(人情)에 끌린 것은

부자군신의역동(父子君臣義亦同) / 부자(父子)와 군신(君臣)도 그 의리 같을 진저.

 

기타

선조는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의 묘를 덕릉이라 불렀는데,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순회세자를 잃은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기로 하고 한윤명(韓胤明), 정지연(鄭芝衍) 등을 사부(師傅)로 선정하여 덕흥군의 세 아들의 교육을 맡게 하였다. 한때 윤원형은 그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덕흥군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강권하여 덕흥군이 수락했지만, 명종이 반대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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