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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조선시대에 편찬 된 <고려사>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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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조선시대에 편찬 된 <고려사>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다.

 

우왕(禑王, 1365년 7월 25일 (음력 7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 1388년)이다. 

우왕의 아명(兒名)은 모니노(牟尼奴)로, 공민왕의 서자(庶子)이자 외아들이다. 그의 생모는 훗날(우왕 즉위년)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된 궁인 한씨로 포고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7세의 나이로 비로소 입궐하여 태후전에서 지냈다. 1373년(공민왕 22년) '우(禑)'라는 이름(名號·諱)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여 이인임의 섭정을 받았으며, 생모로 포고한 궁인 한씨를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했다.

우왕 2년에 신돈의 비첩(婢妾)이었던 반야라는 여성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해 그렇지 않아도 궁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던 점에 의해 의혹이 있었던 그의 출생에 대한 논란이 상당했다. 비록 반야는 처형되었으나 이는 나중에 이성계 일파가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엔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치세(治世)

1374년 10월 몽골의 사주를 받은 왕족인 8촌 형 심왕 탈탈불화(瀋王 脫脫不花)가 스스로 고려왕이라 주장하며 고려의 왕위를 요구했으나, 이인임 등이 군사를 보내 탈탈불화의 입국을 사전 차단하였다.

즉위 초기 친할머니인 충숙왕명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공원왕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태후가 승하한 다음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의 국력과 명운을 쇠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기록의 사실성은 논란이 많다. 한편 그는 부왕 공민왕의 후궁 정비 안씨를 자주 찾다가 정비 안씨는 자신의 오라비인 안숙로의 딸을 그의 후궁으로 천거하였다. 1380년 1월, 명덕태후 홍씨의 훙서 이후에는 사실상 이인임이 섭정으로 실권을 휘둘렀다. 1383년 친정(親政)을 선언하였다.

우왕의 근신(近臣)인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횡행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은 강제 은퇴 후, 1387년 12월부터 이듬해 1388년 1월까지 한 달 간을 문하찬성사 반복해(潘福海)가 대리청정하였지만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이성계와 신진사대부 등에 의해 경산부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왕이인임의 퇴좌 후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1388년(우왕 14년) 5월에 위화도 회군으로 권신이 된 이성계는 자신에게 실권이 박탈된 우왕을 한 달 후 1388년 6월에 퇴위시키고, 우왕의 외아들인 (昌)을 왕위에 올렸다.

이성계, 정도전 등은 후임자로 다른 왕족의 자손을 데려다가 추대할 것을 주장했으나, 목은 이색은 전왕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옳다 하여,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은 그의 아들인 창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요동 정벌과 축출

그해 4월, 최영우왕은 이 기회에 명의 만주 기지인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소로서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하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 불가하고, 온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적이 그 틈을 노릴 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눅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넷째 불가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요동 정벌의 강행을 명령했으며, 최영을 총도통사, 이성계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우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정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명령에 불복하고, 밤에 위화도 회군을 단행해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점령, 최영을 고양으로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해 강화도로 유배한 뒤 우왕의 외아들인 창을 왕위에 올렸다.

 

복위운동과 최후

1388년 창왕은 전왕인 우왕강화도에서 경기도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으로 옮겼으며, 최영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마지못해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신돈의 아들과 손자로 몰아붙여 폐위시키고 최영을 제거한 뒤, 고려 왕실의 먼 종친인 신종의 6대손 정원군의 차남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1389년(공양왕 원년)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 달에 그곳에서 시해 당하였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을 신돈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형관들에게 자신이 왕씨 후손임을 증거로 웃옷을 벗어 겨드랑이의 비늘 같은 것을 내보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사후

그는 신진사대부 세력에 의해 신돈의 아들로 매도되어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국왕 열전이 아닌 반역열전에 실리고, 신우라 칭하였다. 그러나 고려 멸망 후 조선 태종 때에 그를 여흥왕(驪興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시신은 여주군 길천면 대왕리(현 여주시 흥천면 대당리) 산에 매장되었다. 그가 묻힌 곳은 왕이 묻혔다 하여 대왕리라 하다가, 1914년조선총독의 행정구역 개편 때 여주군 길천면과 이천군 부면 일부를 합쳐 여주군 흥천면으로 하고, 여주군 길천면 청당리(淸塘里), 대왕리(大旺里)와 이천군 부면 대왕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왕과 청당의 이름을 따서 대당리라 하였다. 대당리의 자연부락으로 청당이부락 남서쪽에 있는 대왕이부락 마을 뒷산에 우왕의 능이 있다. 그의 능은 여주군 일대에서 왕무덤이라는 이름으로 구전되어 왔으나, 조선 개국 세력에 의해 신돈의 아들이자 반역자로 매도되었으므로, 그의 능은 방치되었다.

 

혈통 논란

우왕의 폐위는 그가 공민왕의 아들, 즉 고려 왕실의 왕씨가 아니라 역적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때문에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의 치세를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편목인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烈傳)에 넣었고, 성과 이름 또한 신우(辛禑)라 적고 있다. 우왕 및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인가 신돈의 혈통인가에 대한 진위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신돈의 혈통이라 기정사실화되고 역사에 기록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우 · 창왕을 폐위를 정당화하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 데는 가담하였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 우왕 부자가 왕위에 오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 정몽주 역시 우왕창왕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조선 후기 국학의 발달로 고려 말년의 기사에 대한 사료 비판과 함께, 우왕과 창왕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졌다. 우왕 부자가 《고려사》의 반역열전에 실린 것에 대해 성호 이익은 《강목》(綱目)에서 진시황(秦始皇)이나 진(晉) 원제(元帝)의 사례를 들며 두 황제 모두 사가들에 의해 전왕의 자손이 아닌 것으로 단정되었지만 위호(位號)는 떼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우왕이 공민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고 공민왕으로부터 아들로 인정받아 아비로써 물려주고 자식으로써 이어받은 것인데 반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안정복은 우왕과 창왕이 왕씨인지, 신씨인지에 대해서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기는 하지만, 창왕이 즉위한 뒤 경연에서 윤소종이 창왕에게 "상왕(上王)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총명(聰明)이 학문으로 향하셨으나" 운운하는 부분을 들며, 폐위되고도 창왕이 즉위했던 당대에는 상왕이라는 칭호로 존숭받은 점은 우왕이 신씨라는 설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왕씨임이 틀림없다고 《동사강목》에서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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