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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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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다.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1919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 회의이다. 회의는 1919 118 개최되어 1920 121까지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의 관계

신한청년당1919 1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범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 714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 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 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8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89 김규식은 김복, 여운홍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

 

중국의 산둥 문제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 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 430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5·4 운동)

 

베트남의 청원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베트남의 청년 호찌민이 찾아왔다.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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