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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김재규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이등병으로 예편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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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김재규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이등병으로 예편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되다.

 

정승화(鄭昇和, 1929년 2월 27일 ~ 2002년 6월 12일)는 대한민국군인, 정치가이다. 한국 전쟁 무렵 백골부대의 대대장으로 활동했고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호(號)는 송산(松山), 벽옹(碧翁)이다.

12.12 쿠데타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해 김재규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보충역 이등병으로 예편되었다가 후에 문민정부에 와서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생애 초반

정승화는 1929년 2월 27일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19대조 정종소는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으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낙향하였다. 그 뒤 18대조 정이교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의 교리를 역임했지만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자 정이교의 처와 자식들은 외가인 김천으로 가서 은거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정착생활을 했다. 1947년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졸업와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6.25 전쟁과 5.16 군사 정변

이후 대한민국 국군이 출범하면서 육군 소위가 되었고, 고속승진 후 중령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와 기계, 경주군 안강 전투, 형산강 도하 작전에 지휘관으로 출전했다. 이어 육군 제3보병사단 작전참모로 재직 중 1953년 휴전을 맞이하였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 때는 육군 본부 예하 방첩부대장(현재의 명칭은 기무사령관)을 역임하고, 현역 대령으로 2군단 작전참모로 재직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의 한 사람에 임명, 겸임되었다. 그해 8월 11일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2년 2군단 작전참모에서 다시 방첩부대장으로 전임되었다. 1962년 7월 30일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월남귀순자 원호심사위원회 심사위원을 겸임하였다.

1963년 11월에는 야당으로부터 군 부재자 투표 당시 선거과정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11월 21일 민주당 이춘기 선거사무장은 정승화 방첩대장이 차규헌(車圭憲) 육본 정보처장과 함께 제2군단방첩대와 대전지구방첩대에서 병사들의 선거 무관심을 유도했다는 의혹이었다. 이어 이춘기 사무장은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며 그가 내린 지령 일부를 입수하여 폭로하였다.

 

각 부대에서는 이미 지시한 대로 선거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사병들은 여전히 선거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군의 본래의 시간 외에 교육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우수한 사병을 선발해서 침투공작으로 성과를 절대 거양하는 방법을 쓰라.

선거법을 무시하고 중대별로 투표소를 정해 투표를 시키되 선발된 사병의 지시에 의해서 투표하게 하도록 한다.

 

그러나 민주당 등 야당 측의 공격에서 그는 별다른 제한이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후 육군 보병 제7사단 참모장 등을 지내고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1군단 참모장, 육군 제7사단 사단장, 1965년 1군단 부군단장, 육군본부 특전감, 1966년 11월 소장으로 진급, 1967년 1월 국방부 인사국장이 되었다.

 

대한체육회 관련 활동

1967년 2월 초에는 베트남 전쟁 파병 군인들의 부재자투표 선거관리단장이 되어 선거절차관리위원에 선정된 군인들을 대동하고 베트남에 다녀왔으며, 그해 2월 24일 대한체육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에는 문교부 체육심의위원에 위촉되어 겸임하였다. 1967년 11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제22차 국제군인체육대회(CISM) 연차 총회에 대한민국 국군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12월 16일에 귀국하였다.

1968년 2월 17일에는 비상조치로 전 장병의 전역 보류 정책을 기안하여 상신시켰다. 이로써 그 무렵 전역 예정된 장병들의 전역은 2~4개월 이상 연장되었다. 3월 4일 대한체육회 이사에 재선임되고 3월 16일에는 육본 인사국장으로 대한체육회 해외파견, 초청심의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과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후 1968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8월 19일 육군종합행정학교 창설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였고, 1968년 10월 16일 육군 종합행정학교 교장이 되었다.

1970년 1군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그해 7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 8월 육본 정책기획부장이 되어 8월 29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터키, 서독, 스웨덴을 방문하였으며, 유럽 순방 중 9월 초 다시 육본 기획참모부장이 되어 9월 6일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을 수행하여 벨기에 카스토의 유럽주둔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를 방문 앤드류 J. 굿페스터 사령관을 면담하고 귀국했다.

1972년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부장, 1973년 3월 6일 육군 중장으로 특진하여 이후 육군 제3군단 군단장 등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975년 9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77년 12월 육군 제1군사령부 사령관, 1979년 2월 1일제22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10.26 사태 전후

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 때에 그 장소인 궁정동 안가 '가'동에 있었으며(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 이러한 사실이 육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목이 되었다.

10월 27일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직무대행이 되었다. 10월 27일 새벽 4시부로 계엄사령관이 되어 김재규 체포 작전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정승화는 심증만 있고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김재규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승화는 불리한 입장에 서 있었지만 야당 인사들과 손잡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야당 인사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11월 28일 이후 대권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정승화는 언론사 간부들을 세 차례나 육군본부로 초대하여 차기 대권을 둘러싸고 국민의 관심이 쏠린 세 사람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즉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무능력하며, 김종필은 너무 부패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당시 군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소신을 가졌던 정승화는 결국 야당 인사들에게 어떠한 협력, 인정도 거부하였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야당에 참여하라는 어느 후배, 동료들의 권고도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강제 예편

1979년 12.12 사태 당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등에게 연행되고, 육군참모총장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등과 함께 고문을 받은 그는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되었고 곧이어 국방부 장관의 형량 확인 과정에서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80년 6월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집행유예형이 내려졌지만 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가 1988년 군적이 회복되었다.

 

생애 후반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 전격적으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1988년 4월 정계 은퇴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1993년에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 고발하고자 장태완, 이건영 등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7년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 대한민국 성우회 회장과 자유민주연합 특임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9년부터는 당뇨고혈압 등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였고, 만년에는 파킨슨병을 앓기도 했다.  2002년에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해 6월 12일 사망했다.

 

사후

셋째 아들 정이열은 그의 생전에 육사 38기로 졸업하고 육군본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정승화는 사후 2002년 6월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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