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한성부 출신.
생애 초반
한훤당 김굉필은 1454년 한성부 정동에서 태어나 집안을 따라 달성군 현풍으로 이주, 그 곳에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일설에는 그의 고향을 대구광역시나 경상북도로 보기도 한다.
영남의 유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어느날 《소학》의 어느 글귀를 읽고 깊이 감동한다. 이후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어,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였다. 그는《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고, 사서육경을 알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전(金詮), 김일손, 권오복, 남곤, 이목, 정여창 등을 만나 교류하게 된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오랫동안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는 1492년 스승이 죽자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서실을 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널리 확산시켰다.
수많은 양반 관료들과 중인들, 양인 자제들까지도 그의 문하에 찾아왔고,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문하생을 받아들였다. 재물 욕심이 없던 그는 일부 뜻있는 지인들과 제자들이 일부 수업료를 냈을 뿐, 수업료 역시 받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는 모재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 주계정 이심원, 이연경, 이약수(李若水) 등의 제자들이 이름이 알려졌다.
관료생활과 무오사화
1494년(성종 25년)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훈구파 재상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훈구파의 거물이었던 이극균은 김종직의 문하생을 대거 발탁해서 요직에 앉혔는데, 그는 후일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이극돈의 친동생이었고, 이극균 자신도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하생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다.
1494년 김굉필은 남부참봉에 제수되었다. 전생서참봉, 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연산군 2년) 군자감주부가 되었다.
그 뒤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을 지냈고, 1498년(연산군 4년) 동문 김일손 등이 실록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과 남곤 등의 연산군 비판, 폐비 윤씨 복위 반대에 염증을 느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유배 생활
이때 그는 김일손, 권오복, 남곤 등의 동문이며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고,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만나 그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김굉필이 유배지(流配地)를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順天) 승평(昇平)에 있던 친한 후배 정여해의 집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자 정여해는 항상 병으로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방문하여 위로했다. 한번은 정여해가 그를 찾아와 김굉필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문(上疏文) 초(草)한 것을 보이고 그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그 상소문을 살펴보고 안 된다고 하며 '만약 이 소장을 올리면 우리 동지들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니 올리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실망한 정여해는 그날부로 상소문을 불살라 버리고 어찌할 수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순천의 집으로 돌아와 이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최후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정여해 등의 친구들이 그를 방문하여 위문했다. 저서로 《경현록》, 《한훤당집》이 전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궁중파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사후
중종 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승정원도승지겸 경연침찬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년)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은 1519년(중종 13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화를 받으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해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선조 10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문묘 종사 배경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배향을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배향을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의 문하생인데 추향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문묘종사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신중론을 폈다.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배향을 발의하고 기준(奇遵)이 배향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으며, 정몽주가 길재를, 길재는 (여러 대를 거쳐) 김종직을, 김종직은 김굉필을 가르쳤으니 (도학의 학통이 이어진 것이며) 김굉필이 송유(宋儒)의 실마리를 얻어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니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해서도
배향을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참찬관 김정(金淨)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배향을 건의했다. 그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계 스승을 배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훈구파는 물론 온건 사림파들,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의 문인들 역시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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