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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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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기묘사화

위훈 삭제 사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자 왕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들에게 찾아가 조광조를 죽일 것을 모의케 하자 홍경주영중추부사 김전(金銓) 등과 함께 몰래 왕에게 글을 보내어 상변하려고 해도 왕을 모신 근시(近侍)가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밤중에 들어가 상변하겠다고 청했다. 남곤은 이 자리에 참석하였으나 사림파 신진 인사들을 구원하지 않고, 훈구파 대신들의 사림 제거 음모를 묵인하였다.

그날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드디어 음력 10월 15일홍경주·김전·남곤·이장곤(李長坤)·고형산(高荊山)·심정·홍숙(洪淑)·손주(孫澍)·방유령(方有寧)·윤희인(尹希仁)·김근사(金謹思)·성운(成雲) 등은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중종을 만나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 달라고 주청하였다.

 

개혁 실패의 원인

그는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 승지를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신진 변혁주체들이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보수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만들어 불만세력을 만들어버렸다. 또한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개혁에 대해 불안을 느껴 조광조를 처단한다.

한 세대 뒤의 유학자 이황이나 그의 손제자인 율곡 이이 역시 이러한 점을 들어 그의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유배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 (李耔)·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찬 심달원(沈達源)·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洪彦弼)·박훈(朴薰) 등이 체포되었다. 처음에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11월 16일 옥에 갇혔다.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臣)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후일 1667년(현종 8년) 그의 적려유허비가 세워졌다. 적려유허비는 후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된다.

 

최후

권력을 잡게된 심정과 남곤 그리고 홍경주는 조광조를 살려두려 하지않아서 중종은 결국 음력 12월 20일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에 귀양을 간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이때 그의 동지인 김식, 김정 등도 연루되어 자결, 처형되었다.

그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그를 만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21세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가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음력 12월 20일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사망 직후

사사당한 그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그가 유배된지 1개월 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 추모옥은 후일 죽수서원으로 발전한다. 선조1년(1568)에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을 논의하였고, 이에 따라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리로 관을 옮겨 반장(返葬)을 했더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다고 전한다.

그의 영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제작되었으나 대부분 실전되었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 국오(菊塢) 정홍래(鄭弘來)가 그린 영정이 후대에 전한다.

 

신사무옥

신사무옥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 경멸하게 되었다. 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남곤, 김전 등과 교류하던 성희안유순정 역시 이미 사망하여 그의 편을 들어주는 인물은 없었다. 도리어 남곤은 조광조 등의 사사가 결정될 때 반대하였지만,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않은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후에 훈구파의 영수인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할 때 배신자, 변절자로 지목된 남곤, 김전 역시 제거하려 모의하였다.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남곤, 심정 제거 모의는 송사련(宋祀連)의 밀고로 탄로났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조광조 등의 개혁파가 중종 기묘년에 사화를 당한 10년 후에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신원회복을 요청했다. 1540년부터 조광조 복권 논의가 나타났고 중종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곧 사망한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일단 복권되었으나 명종 즉위 후 다시 추탈당하였다.

 

사후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불렀다.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 양산보(梁山甫)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1553년(중종 38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경연(經筵)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는 자리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伸冤 復元)을 문신(文臣)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사면 상소를 올렸다.

1544년(인종 원년) 인종이 즉위하고 평소 존경하던 스승 김인후(金麟厚)와 이황(李滉) 등의 상소와 그를 평소 동정하던 인종의 뜻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 명종 초에 훈구파인 이기에 의해 계속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1559년(명종 14년)에는 경상도 산음(山陰)의 유생(儒生) 배익겸(裵益謙)이 정사의 폐단을 논하면서 그의 개혁정치를 언급했다가, 훈구파들로부터 비판 공론이 다시 나타났으나 1560년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李樑)이 그를 두둔하여 무마시켰다. 선조 대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1567년(명종 21년) 선조 즉위 후 기대승에 의해 조광조에 대한 복권과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진 이후, 계속된 사림파들의 상소와 주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증직이 내려지고, 시호가 추증되었다. 1582년 신도비가 세워졌고, 신도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하였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1519년(중종 14년) 학포 양팽손에 의해 건립된 사당에 사액이 내려져 1570년(선조 4년)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이 된 이후,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司)가 세워져 배향되었다. 그밖에 한때 정몽주를 배향한 용인 모현면의 충렬서원에 배향되었다가 1650년(효종 원년)에 그의 묘소 근처에 세워진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위패를 옮겨왔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에 있으며 묘소에서 약 550m 거리에 심곡서원이 있다. 그 외 양주의 도봉서원 등에도 배향되었다.

  

국왕의 솔선수범론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실력과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채용 등이었다. 그는 또한 국왕이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이는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으며, 국왕이 먼저 사사로운 욕심과 사심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며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스스로 정체(政體)를 세우고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하여 활용할 것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소학과 도덕윤리 보급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은 소학(小學)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 배분하였고, 그와 그의 동료 사림들은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보급하였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향촌에 보급하는 동시에 지방에서의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사림파가 주도하는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그가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소학'은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담은 서적으로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그의 스승 김굉필은 소학동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소학 연구에 치중하였으며 '업문(業文: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소학이나 사서 육경 외에도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인쇄, 간행하여 조선 팔도에 배부,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이념을 확산시키려 한 노력의 결과였다.

동시에 그는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추진하였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던 기관이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려는 정암으로선 도교적 제천행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거병과 군자론

도적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해도 정당한 명분을 갖추지 않고, 비밀리에 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논의였다. 중종연간에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일대를 노략질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이 죄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자, 변장은 도망갔고 화가 난 중종은 토포사를 구성하여 출정시킨다.

1518년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긍정적 평가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중의적 평가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도교·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전지를 몰수하였다.

 

부정적 평가

급진적이었다는 점이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되고 있다. 선조때의 성리학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며 그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퇴계 이황(李滉)은 '퇴계집(退溪集)'에서 “그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해 그 실행한 바가 지나침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학력이 넉넉하고 덕기(德器)가 이뤄진 뒤에 나와서 나라의 일을 담당했던들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민이 요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묘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다”라고 했다.

또한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라는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기타

인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과 심정을 ‘곤쟁이 젓갈’(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둘을 싸잡아 비난한 말. 이후 ‘곤쟁이 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퍼졌다)이라고 두고두고 욕했다. 그가 사사될 당시 그를 제거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로 심정과 남곤이 지목되었다. 김전 역시 조광조의 죽음에 관계되었다 하여 배신자나 변절자로 몰려 후배 사림파로부터 지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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