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하나회, 12.12군사반란, 5.17쿠테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도 참가하다.

반응형

 

 

하나회, 12.12군사반란, 5.17쿠테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도 참가하다.

 

하나회 혹은 신군부(新軍部)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군사 조직이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의 각 기수를 내려오면서 주로 경상도 출신 소장파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하였다.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를 주도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도 참가했으며,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핵심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창설 초기

1951년, 4년제 육군 사관학교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등 5명이 5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이다.

1961년 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권익현, 최성택, 백운택 등 육사 11기들이 친목 모임으로 칠성회를 만들었다. 이게 나중에 하나회로 바뀌었는데, 오성회 구성원이었던 김복동은 그때 탈퇴했다.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5성회는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확대 개편 과정을 여러번 거쳤다. 이들은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육사 8기를 몰아내기 위해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동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한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나회에 가입하기 위해서 가입 대상자는 보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 절차를 거쳤다.

 

하나회의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을 복종한다.

하나회원 상호 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이상의 서약을 위반할 시 '인격말살'을 감수한다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보안사령부 내사과 등의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하여 승진이나 자리이동때 선배가 후배를 추천하고 밀어주는 식으로 군내 주요 요직을 독점하였다. 1973년 윤필용 사건에서 수사 도중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조사한 하나회는 (1) 정규육사 출신을 기본 정원제로 가입, 10명 내외로 (2) 회원 다수는 영남 출신이 점한다. (3)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한다. (4) 고위층으로 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징수 (5) 회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진급 및 보직 상의 특혜 라고 밝혀졌다.

팀의 초기 리더는 윤필용전두환 등으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한풀 꺾이지만, 조직의 다른 우두머리인 전두환은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 그에 대한 박정의 각별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세력이 되었으며, 서로에 대해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가 하나회 멤버임을 과시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

1979년10·26 사건 이후 육사 11기, 12기생 회원들을 중심으로 권력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이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하나회 인사들은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참모차장에 직접 임명하였다. 12·12 군사 반란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과 12·12 군사 반란 비호한 일부 장성들의 세력은 "새로운 군부 세력"이란 뜻으로 '신군부'로 불리게 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부 세력들은 5월 초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하여, 방해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불법 연행하고, 국회에 군병력을 주둔하여 임시국회를 무산시키는 등 반대 세력을 탄압하였다. 또한, 이들은 5·17 쿠데타에 항거하여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 하였다.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과 같은 군내 요직 뿐만 아니라 전역 후에도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해체 과정

1993년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非)하나회로 분열되어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사태는 양측이 한 선술집에서 맥주병이 깨지고 바닥에 뒹굴며 난투극까지 치르는 소동을 벌인 뒤에야 다소 진정되었으나, 이미 동기생들 간의 앙금은 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93년 4월 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익명의 군인에 의해 '하나회' 명단이 살포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문민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진행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책임과 12·12 군사 반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등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속 논란

하나회는 사실상 육사 36기부터 종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일각에서는 현 소장, 준장급 장성들 가운데 하나회 멤버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예비역 단체도 잠식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군부라는 인식이 없지만 내부적으로 알력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다. 때문에 대령에서 준장으로의 진급심사에서 총 공석 55자리 중 육사출신이 무려 40석이나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진급총원의 78%에 달한다. 이는 비육사 출신 공석을 모두 합친 것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숫자이다.

군내 유사한 사조직으로 청죽회,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가 있었으나 문민정부의 군사 조직 금지조치 이후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지만 내부적인 알력이 아직 남아 있으며 특히 현역에서 예비군의 세력다툼이 심각하다.

 

☞ 연관글

[역사보기] - 12.12 사태, 12.12 군사 반란, 전두환 소장 군부 권력을 장악해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