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술,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6.6반민특위습격사건으로 풀려나다.

 

노덕술(盧德述, 일본명: 松浦 鴻 (まつうら ひろ) 마쓰우라 히로,

1899년 6월 1일 ~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경찰이다.

 그의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일제강점기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홋카이도에서 취직을 위해 머물렀다.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양주경찰서와 개성경찰서 경부로 재직 당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시국좌담회에 참석하고 지도하는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 총독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1941년 3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그해 6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으로 근무했다.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6월 전시체제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이외에 징병, 운송, 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되자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에서는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이사를 지냈다.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협력했다.

 

광복 이후

광복 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이후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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