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 공물법을 폐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다.

 

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이며,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 병조참판,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전사업을 건의, 민간에 주전(鑄錢)의 유통에도 성공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여 양력 사용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1651년부터 1654년, 1655년부터 1658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이다. 현종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

 

재난 구호

당시의 내외 상황을 조선의 엄청난 위기로 파악하고 그 본질을 전쟁 방어를 소홀히하고 국력을 낭비한 위정자들의 과오 등이 빚어낸 민심이반(民心離反)으로 보았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여러 가지 안민책(安民策)의 실시를 통해 극복하려 하였다. 1644년에는 명나라청나라 사신이 다녀갈 때 공녀와 인삼, 비단 등을 요구하는 폐단을 폐지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고, 1627년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을 일시적으로 중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으로 흉년과 기근, 인명 피해, 재산 피해 등으로 유랑자가 다수 발생하자 세금 감면과 농작물 지원, 도망치거나 이주하는 주민에 대한 오가작통이나 족징 등의 단속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기근과 질병, 부상과 각종 재난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 치료할 목적에서 선조, 광해군 대에 편찬된 각종 의학 서적의 인쇄, 복사, 배포하였으며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瘟方)》 등을 편찬하였다.

 

경제활성화 정책

백성을 유족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그는 화폐사용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엽전 발행을 장려하였는데,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布)와 쌀만을 유통수단으로 사용할 뿐 변변한 화폐가 없는 데서 문제점을 찾았다. 그래서 동전 사용을 강조하였고 나아가 백성에게 각지에 퍼져 있는 은광 개발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농업의 장려와 작물 생산의 확산을 위해 수로 건설과 수차(水車)의 사용 등 농사기술의 개선, 수레의 사용, 시헌력 사용을 통하여 기후 예상 등을 추진하였다. 그 밖에 가뭄 등의 재난을 예방하는 방도로서 전국 각 지역에 빙고와 비슷한 수 저장고를 만들고, 한성에는 각 개천을 준설하자는 견해를 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주장이었다. 또, 세곡선의 침몰이 잦았던 안흥량(安興梁)의 바닷길을 피해 태안(泰安)에 창고를 설치하고 육로를 일부 이용하여 세곡을 운송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던 동시대의 재야 경제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의 사상을 접하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이론을 실권을 가진 자로서 현실적으로 적용하려는데 치중하였으나, 산림의 반발을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가와 비판

왕조실록에는 그의 인물평을 말하기를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 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고 하였다.

후대의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건 한 인물'이라며 '진보적 정치가'라고 평하였다. 이덕일은 '김육은 정도전, 조광조 등과 함께 조선 시대 최고의 개혁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경제 정책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충청도 관찰사 재직시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및 크게 주장하였다. 이는 그의 사후 장남 김좌명에 의하여 전라도 · 경상도 · 황해도에 차례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또한 서양의 새로운 역법(달력법)인 신력효식(新曆曉式)을 보고 1653년부터 시헌력이라는 새 역법을 시행하게 하였으며, 수레를 제작하고 관개에 수차의 활용을 건의하였다. 1651년 상평통보의 주조를 건의하였고, 병자호란 때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 많은 서적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동법은 왜란 후 삶이 어려워진 백성을 위한 대안으로 내세워진 것이지만 진상별공의 폐단은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조실록의 비판에 의하면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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