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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 기사사화,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서 사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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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 기사사화,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서 사사하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15년(1689년)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

 

경과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상소를 하여 송나라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낳았으나 후궁(後宮)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嫡子)가 없이 죽음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계승하였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의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 후 남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등용되었다. 이후 갑술옥사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원인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의 원자를 정호(定號)했을 때에 찬성하여 발생했던 민씨 폐출(廢黜)이다. 즉, 숙종은 이미 원자의 명호가 결정되었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 하여 분하게 여기던 차,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이익수(李益壽)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여 왕의 의견을 좇으니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 유배시킨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 밖에 송시열의 의견을 따랐던 서인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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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보기] -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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