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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선왕, 해동성국, 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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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선왕, 해동성국, 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루다.

 

선왕(宣王, ? ~ 830년, 재위 : 818년 ~ 830년) 은 발해의 제10대 국왕이며 인수(仁秀)이다.

 

치세

선왕은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현손(玄孫)이며, 연호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요하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부여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모든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가계

아들 : 대신덕(大新德)

손자 : 대이진(大彝震, ? ~ 857년, 재위 : 831년 ~ 857년)은 발해의 제11대 이다. 발해 제10대 왕 선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대신덕(大新德)이다. 연호는 함화(咸和)를 사용하였다. 시호는 미상이다.

부(府), 주(州)의 확정과 중앙집권적인 행정 제도의 확립에 노력해 동시에 군사 기구를 발전시켜 모병제에 의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당서》에는 발해의 군제로서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좌우삼군(左右三軍)·일백이십사(一百二十司)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당과의 적극적인 문화 교류에 따라 당의 제도가 발해에 널리 전해져 일부 유학생이 과거에 급제 하는 등 발해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즉위 후 여러 사신과 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왕자 대명준(大明俊)을 832년836년, 837년 세차례에 걸쳐 수십인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왕자 대선성(大先晟) 대연광(大延廣) 대입악(大立萼) 등도 833년, 839년, 846년에 각각 당에 파견하였다.

이때 학생 해초경(解楚卿), 조효명(趙孝明), 유보준(劉寶俊), 이거정(李居正), 주승조(朱承朝), 고수해(高壽海) 등도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장건장(張建章)이 서적을 가지고 발해에 들어오는 등 발해와 당나라 양국 간 문화적 교류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일본과도 빈번한 내왕이 있어 선왕 때 이어 왕문구(王文矩)가 계속 파견되었고 하복연(賀福延) 등도 파견되었다.

 

손자 : 대건황(大虔晃, ? ~ 871년, 재위 : 857년 ~ 871년)은 발해의 제12대 이다. 발해 제10대 왕 선왕의 차남이며, 대이진의 동생으로, 시호는 알 수 없다. 환단고기에서는 안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859년 오효신(烏孝愼) 등 104명의 사절을 일본에 파견했을 때 달력인 「장경선명력경(長慶宣明暦經)」을 일본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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