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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고종, 홍릉 황제릉의 양식 고종, 홍릉 황제릉의 양식 능의 구성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 더보기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최초의 근대 국제법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최초의 근대 국제법 불평등 조약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또는 강화도조약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하며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배경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 더보기
임오군란,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으로 훈련도감 구식 군인들이 항쟁하다. 임오군란,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으로 훈련도감 구식 군인들이 항쟁하다.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6월에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개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5영을 파하고 2영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10년간 월급이 체불되었고 나중에는 군대에서 쫓겨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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