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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왕위가 부자에게 정통적으로 세습된 국가이다.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왕위가 부자에게 정통적으로 세습된 국가이다. 금관가야(金官伽倻), 본가야(本伽倻)는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로, 신라에게 멸망하기 전 국명은 가락국(駕洛國)이었다. 가락국(駕洛國)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가야 연맹체의 맹주였다. 그러나, 4세기 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종발성 등 낙동강의 동쪽과 북쪽 지역(현재의 부산, 양산, 밀양)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반파국과 안라국에 연맹체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국명 금관가야(金官伽倻)라는 이름은 가야 시대로부터 한참 후대인 고려의 왕건이 붙인 이름이다. 금관가야에 대해 처음 사서에 전하는 이름은 구야국(狗邪國) 또는 .. 더보기
고이왕, 왕권 강화로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다. 고이왕, 왕권 강화로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다. 고이왕(古尒王, ? ~ 286년, 재위: 234년 ~ 286년)은 백제의 제8대 국왕이다. 구이왕(久爾王)·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여(扶餘) 일본의 사서 《신찬성씨록》, 《일본서기》등 에는 구이(久爾) 또는 구이(仇爾), 고모(古慕) 등의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었다.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보는데,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초고왕, 구수왕과의 가족관계 여부 연대차이로 이견이 존재한다. 생애 고이왕의 가계는 불확실한데 고이왕은 보통 《삼국사기》의 기록.. 더보기
미천왕, 을불, 신분을 숨기고 소금장수로 숨어 지내다. 미천왕, 을불, 신분을 숨기고 소금장수로 숨어 지내다. 미천왕(美川王, ? ~ 331년, 재위 : 300년 ~ 331년)은 고구려의 제15대 군주이다.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 등이 전해진다. 서천왕의 손자이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을불은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면서 숨어 지냈다. 사람들은 봉상왕보다 을불을 더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300년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을 폐위할 마음을 품고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이후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초부터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302년에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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