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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

조광조의 개혁정치, 위훈삭제, 중종과의 갈등 조광조의 개혁정치, 위훈삭제, 중종과의 갈등 관료 활동 그해 바로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 상소를 올려 화제가 된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그 이튿날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던가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됐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하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후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놓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 전적을 거쳐 .. 더보기
조광조, 중종은 조광조의 시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다. 조광조, 중종은 조광조의 시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다.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 더보기
김안로, 시비걸기를 좋아하여 여러차례 옥사를 일으키다 김안로, 시비걸기를 좋아하여 여러차례 옥사를 일으키다. 김안로(金安老, 1481년 ~ 1537년 10월 27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외척이다.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김전의 형 김흔의 셋째 아들이다. 김제남의 종증조부이다. 중종의 딸 효혜공주(孝惠公主)의 남편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는 그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과 사간원 등의 요직을 거쳐 대사간을 지냈다. 언관으로 있으면서 여러 시정의 폐단을 해소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시비걸기 좋아하는 인물로 몰리기도 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희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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