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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순조, 대리청정기의 세도 정치 견제를 시도하다. 순조, 대리청정기의 세도 정치 견제를 시도하다. 순조(純祖, 1790년 7월 29일 (음력 6월 18일) ~ 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는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년-1834년)이며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성은 이(李), 휘는 공(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사후 시호는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다. 이후 철종 때 정원용(鄭元容)의 의견에 따라 묘호가 순종에서 순조로 바뀌었고, 1897년 숙황제(肅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 더보기
인릉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능 인릉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능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능의 형식 : 합장릉 능의 조성 : 1856년(철종 7), 1857년(철종 8) 능의 구성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능이다. 인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우왕좌비(右王左妃)의 형식에 따라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에 순원숙황후를 모셨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안에는 두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左’)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 더보기
공명첩, 돈을 받고 벼슬을 팔다. 공명첩, 돈을 받고 벼슬을 팔다. 공명첩(空名帖)은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려고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하직(명예직) 임명장이며, 공명(空名)이란 “받는 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이란 뜻이며, 첩(帖)은 사령장 또는 임명장을 뜻한다. 중앙의 관원이 이것을 가지고 팔도를 돌면서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 공명첩이 그 기능을 하게 된다. 공명첩에는 벼슬을 내리는 공명도 신첩(空名告身帖)과 천인을 양인이 되게 하는 공명 면 천첩(空名免賤帖, 노비면천첩), 향리에게 역을 면제하는 공명 면 향첩(空名免鄕帖) 등이 있었다. 공명첩은 돈을 받고 벼슬을 팔았다는 점에서는 납속 수직 제도이며, 면천을 해 주었다는 점에서는 속량 제도의 일종이다. 또한 구휼에 필요.. 더보기
화완옹주, 사도세자의 친동생, 영조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다. 화완옹주, 사도세자의 친동생, 영조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다.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3월 9일 (음력 1월 19일) ~ 1808년)는 조선 제 21대 임금 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이다.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후겸은 그녀의 양자이다. 1749년(영조 25) 7월 6일 소론의 거두 정휘량의 조카이자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의 아들 정치달에게 하가하였다. 정치달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자 시댁 일가의 아들인 정후겸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정조 즉위 후 양자 정후겸과 함께 이른바 "《명의록》의 의리"에 반한 죄인으로 취급되어 몰락하였다. 양자 정후겸은 사사당하고 그는 옹주의 호를 삭탈당해 '정치달의 처(정처)'라고 .. 더보기
홍경래의 난,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다. 홍경래의 난,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다.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은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이다. 조선 초기에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 더보기
신유박해,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 시파의 숙청이었다. 신유박해,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 시파의 숙청이었다.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의 로마 가톨릭교회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원인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신해박해(1791년, 정조 15년)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 이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하였다. 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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