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원경왕후

성녕대군, 39세의 늦은 나이로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본 태종과 원경왕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자라다. 성녕대군, 39세의 늦은 나이로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본 태종과 원경왕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자라다. 성녕대군 이종(誠寧大君 李褈, 1405년 8월 3일(음력 7월 9일) ~ 1418년 3월 11일(음력 2월 4일))은 조선 태종 임금의 제4적자로 이름은 이종(李褈), 본관은 전주이다 생애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적자)로, 39세의 늦은 나이로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본 태종과 원경왕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자랐다. 1411년 성녕군(誠寧君)에 책봉되었고 1414년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진봉되었다. 우애가 깊고, 학문에도 뜻이 있었으나, 1418년(태종 18) 음력 2월 4일에 홍역에 걸려 14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인은 성억의 딸이다. 후에 셋째형인 세종(충녕대군)이 즉위한후,.. 더보기
소헌왕후, 세종의 왕비,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 소헌왕후, 세종의 왕비,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10월 12일 (음력 9월 28일) ~ 1446년 4월 19일 (음력 3월 24일))는 조선 세종의 왕비이다. 별호는 공비(恭妃),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다.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靑川府院君 安孝公 沈溫)의 장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집안이 멸문당한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마찬가지로, 소헌왕후 또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을 잃는다. 특히 남편 세종대왕을 이해하고 내조를 했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이는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이다. 일생 1395년 문하시중 심덕.. 더보기
효령대군, 숭유억불정책으로 부터 불교를 옹호하다. 효령대군, 숭유억불정책으로 부터 불교를 옹호하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 1월 6일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6월 12일(음력 5월 11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자, 왕족, 서예가, 정치가이다.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조선 세종대왕의 둘째 형으로 성씨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름은 보(補)이다.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개명하였다. 자는 선숙(善叔)이고, 호는 연강(蓮江)이며 불교 법명도 연강(蓮江)이고,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세종대왕의 형이자 세조의 백부로 실의 원로였으며, 조선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 더보기
양녕대군, 시와 서에 능했지만 부왕 태종에게 신망을 잃다. 양녕대군, 시와 서에 능했지만 부왕 태종에게 신망을 잃다. 부왕 태종과의 갈등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더보기
양녕대군, 세자 폐위 배경을 세가지로 추론하다. 양녕대군, 세자 폐위 배경을 세가지로 추론하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 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이다. 그는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 더보기
세종, 영릉,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 세종, 영릉,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 능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더보기
원경왕후, 태종의 비, 가장 정치적인 왕비 원경왕후, 태종의 비, 가장 정치적인 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년 7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420년 8월 18일 (음력 7월 10일))는 조선 태종(太宗)의 왕비이자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모후이다.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驪興府院君 文度公 閔霽)의 둘째 딸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으나 후일 남편에 의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 왕조에서 정희왕후, 문정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왕비이며, 성격 또한 담대하고 괄괄하였다. 개경 철동에서 태어났다. 18세인 1382년에 황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이성계의 5남이자, 아버지 민제의 제자인 이방원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결혼 후 10년 동안 위화도 회군,.. 더보기
태종, 헌릉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 태종, 헌릉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 능의 구성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