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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칠적

한일신협약, 정미년에 강압에 의해 체결된 협약으로 한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다. 한일신협약, 정미년에 강압에 의해 체결된 협약으로 한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다.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일본어: 第三次日韓協約)은 1907(융희 1)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 협약,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 협약(第三次韓日協約)이라고도 한다. 별칭으로는 정미협약(丁未協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제2차 을사 조약(第二次乙巳條約) 등의 별칭이 있다. 배경 헤이그 특사 사건(海牙特使事件)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 경성에 파견, 한국 측이 을사 보호 조약을 위반하였다 하여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더보기
이완용, 을사오적,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하다. 이완용, 을사오적,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하다. 이완용(李完用, 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양력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매국노, 친일파이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문과 급제 후 수구파로서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구했고, 신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공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 내의 미국 전문가이자 내각의 실세로서 대미협상을 전담했지만, 정작 미국이 제 잇속만 .. 더보기
정미칠적,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 정미칠적,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 정미칠적(丁未七賊)은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를 가리킨다. 이완용을 비롯하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명의로 체결된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도록 협조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정미칠적 모두가 선정되었다. 명단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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