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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다. 정조,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다.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규장각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 더보기
신해통공, 정조, 육의전 이외에는 난전을 금할 수 없게 하다. 신해통공, 정조, 육의전 이외에는 난전을 금할 수 없게 하다. 신해통공(辛亥通共)은 조선 후기인 1791년(정조 15년) 시전의 국역은 존속하되 그들의 도고 상업(금난전권)은 금지시킨 조처이다. 통공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에는 많은 새로운 시전이 설립되어 6의전 및 기성의 일반 시전과 같이 모두 금난전권을 행사하고 도 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도시 상업의 발달로 인한 시전 수의 증가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었지만, 시전의 도고권이 육의전과 같은 몇몇 관수품 조달상에 한정되지 않고 도회지인의 생필품 상인 전부에게 주어짐으로써 생기는 폐단은 대단히 컸다. 이에 대해 영세 사상(私商)층이 부단히 공세를 펼쳤으며, 또한 도회지 세궁민이 크게 반발하게 되자 조선 정부도 절정에 달한 도고 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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