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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

광개토왕비, 고구려사 연구와 금석문 연구의 좋은 사료가 되다. 광개토왕비, 고구려사 연구와 금석문 연구의 좋은 사료가 되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또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지안 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 중국어 간체: 太王镇)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능비이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개설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지만 고르지 않다. 대석은 3.35×2.7m 이다.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 더보기
유화부인, 고구려 동명성왕의 어머니, 압록강가에서 해모수를 만나다. 유화부인, 고구려 동명성왕의 어머니, 압록강가에서 해모수를 만나다. 유화부인(柳花夫人, ? ~ 기원전 24년 음력 8월)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어머니이다. 여동생들과 함께 압록강가에서 놀다가 북부여 왕 해모수의 꾐에 빠져서 그를 가까이 하자, 아버지 하백에 의해 태백산 우발수로 쫓겨나서 동부여(東夫餘)의 금와왕(金蛙王)을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그 후 해모수와의 관계를 알게 된 금와가 방에 가뒀는데, 이때 알을 하나 낳았다. 왕이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고 길에 버려도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려도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다시 유화(柳花)에게 돌려주어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이 아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 주몽(朱蒙)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 더보기
금와왕, 해부루의 아들, 태백산 남쪽에서 유화를 만나다. 금와왕, 해부루의 아들, 태백산 남쪽에서 유화를 만나다. 금와왕(金蛙王, 기원전 89년? ~기원전 24년 재위:기원전 60년경~기원전 24년경)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 이름은 금와(金蛙)이다. 금와(金蛙)는 금빛이 나는 개구리라는 의미이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이다. 부여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이다.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 더보기
동명성왕, 추모왕, 주몽 고구려를 건국하다. 동명성왕, 추모왕, 주몽 고구려를 건국하다. 동명성왕(東明聖王) 또는 추모왕(鄒牟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다. 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본래이 성은 해(解)였다가 건국후 고(高)로 고쳤다, 휘가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등에는 추모(鄒牟)·중모(中牟)·중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부여의 건국자인 동명과 주몽은 별개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여의 금와왕 재위 시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 의해 핍박받던 주몽은 박해를 피해 남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탄생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동명왕..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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