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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헌강왕, 불교와 학문의 장려에 노력하다. 헌강왕, 불교와 학문의 장려에 노력하다. 헌강왕(憲康王, ? ~ 886년, 재위: 875년 ~ 886년)은 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정(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신라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875년부터 88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875년부터 879년까지 숙부 김위홍(金魏弘)이 섭정하였고 879년부터 886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생애 당나라에 876년 7월에 사자를 보내고 공납을 행했다. 878년 4월에는 당 희종으로부터 〈사시절·개부동의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侍節・開府儀同三司・検校太尉・大都督・雞林州諸軍事・新羅王)〉에 책봉 되었다. 동년 7월에 사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황소의 난이 일어난 것을 이유로 사자의.. 더보기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군주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다.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 더보기
안압지, 월지, 신라 왕궁의 별궁 터 안압지, 월지, 신라 왕궁의 별궁 터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는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 터 이다.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되었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이다.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연못 안에는 3개의 성(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 더보기
원효,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원효,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더보기
진흥왕,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다. 진흥왕(眞興王, 526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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