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보기

문수산성,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루다.

반응형

 

문수산성,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루다.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이다.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기 위하여, 1694년(숙종20)에 축성되었는데 이후 1812년 (순조12)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세 개의 문루와 세 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특히, 이 성은 1866년(고종3)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奉常寺事) 한성근이 광주(廣州)의 별파군(別破軍) 50명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작은 배가 성의 남문밖에 다달아 정박하였는데, 한성근이 이끄는 우리 수비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격전으로 해안 가의 성벽과 문루 등의 시설이 파괴되고 성안이 유린되었다. 이 전투 때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다. 지금은 성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1995년에 일부가 조사되어 길이 16m이고 너비가 10m 규모의 치성이 서남쪽 끝에서 확인되었고, 평탄지에서는 성벽이 내외겹축 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서벽의 내벽은 외벽의 붕괴를 방지하게 위해 약 20~30m 크기의 잡석들과 진흙을 이용하여 뒤채움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평지에서 성을 축조할 때는 협축법(狹築法)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문수산성의 경우에는 그러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내탁(內托) 즉 내부를 의지하고 있는 방식을 하였다. 그 구조는 잡석을 쌓은 후에 진흙을 다져 쌓아 올리는 판축(版築) 방식을 취하였다. 석축의 모습은 상대부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작아 지고 있다. 화강암에서 떼어낸 반듯한 장방형 석재를 높이 3m 내외로 정연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는 여장(女墻)을 설치하였다. 사적 제139호이다
 방형의 성곽과 홍예문, 문루를 갖추고 있다. 주변의 전경은 아직 관광 차원의 관리가 덜 되어진 듯 덤불 속에 남아 있다. 팔작 지붕에 겹처마의 문루는 이중 단의 성곽 위에 세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방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루에 맞게 성벽이 조성되던 다른 성벽과는 달리 좌우로 길게 축조되어 있고, 짜임새 좋게 잘 정돈되어 축조되어 있다. 당시의 성문 흔적을 나타내주고 있는 홍예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깔끔히 축조된 홍예석들로 이루어진 홍예문이 이 자리가 북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성곽의 자취만을 몇 개의 판석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깔끔히 다듬어진 장방형의 판석들은 고른 크기를 보인다.
반응형